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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18. 2019

자기, 소유, 목표

존재냐 관계냐

연주자가 기타를 사용해 연주를 하듯

요리사가 재료를 사용해 요리를 하듯

수학자가 수식을 사용해 문제를 풀듯

사람이란 도구를 사용해 목표를 달성한다.

사람과, 도구와, 목표다.

각각은 서로 다른 존재다.


자기에 집중하는 우리는 인정받음, 사랑받음, 관심받음을 좆는다.

소유에 집중하는 우리는 비싼 집, 비싼 옷, 비싼 물건을 좆는다.

목표를 달성하는데 익숙한 우리는 높은 시험 점수, 좋은 학교의 졸업장, 고액 연봉과 같은 목표를 좆는다.

셋은 모두 서로 다른 존재다. 존재를 좆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존재를 좆으면서 관계를 후순위로 두거나 심지어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목표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다. 그러나 관계가 상한 결과는 근시안적임을 안다. 오래 가지 못한다. 건강한 관계가 건강한 결과를 꾸준히 내놓는다. 친구를 돈으로 보면 그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한다. 건강한 관계가 꾸준히 가면 돈보다 더 값어치있는 삶을 만든다. 관계가 질 (quality)을 만든다. 존재가 먼저 오고 관계가 오는게 아니라, 관계가 존재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의지로 무엇을 하는게 아니라, 관계가 내 갈 길을 보인다. 나는 그 길에 순종한다. 존재를 벗어나 관계에 집중하는 삶이다.


활쏘기에서 과녁의 의미는 무엇인가. 10점을 맞추면 잘 하는 것이고 1점을 맞추면 못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답인가 아닌가. 존재적인 질문이다. 결국에 정답을 맞추라는 결과지상주의적 태도에는 관계성이 배제된다. 그러니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과녁은 활이 나아갈 길을 드러내는 도구다.

아래 그림에서 한 줄의 점선으로 표현된 길은 곧 관계다. 길은 이미 그 곳에 있었다. 과녁에 의해 길이 마음 속으로 드러난다. 과녁이 하는 역할이다. 과녁은 정답을 맞추라고 있는게 아니라 과녁과 연결된 길을 드러내기 위해 있다. 목표와 나의 관계다. 나와 활의 관계, 활과 과녁의 관계, 그리고 나와 과녁의 관계. 이 세 관계가 일치했을 때 화살이 자연스러운 길을 따른다. 화살이 제 힘으로 역경을 헤치고 나가는게 아니라 있는 길을 순조롭게 따르도록 쏜다는 말이다. 순종의 힘이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악보를 외운 후 잊으라는 격언이 있다. 악보가 제시하는 바를 이해했다면 더 이상 그것을 목표로 얽매이지 말고 나와 소리의 관계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악보를 통해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할 길을 떠올린다. 이 역시 목표와 나의 관계다.

수학문제를 푼다고 하자. 문제가 풀리면 과녁에 맞은 것이고 풀지 못하면 과녁에 맞지 않은 것이다. 답만 맞으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결과와 과정이 무관계하다는 태도다. 답이 맞았다거나 틀렸다는 사실보다 나와 문제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보자. 그 관계가 조화를 이루면 길이 선명히 드러나고 각각의 존재가 각자의 의미를 충실히 갖는다. 나는 그저 길에 따를 뿐이다. 그럴 때에야 질 (quality)이 나타나고, 자연히 목표를 달성한다. 의도하거나 힘들이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는 무위(無爲)의 기예다. 같은 10점의 결과라도 그것을 의도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질에서 큰 차이가 난다. 억지스러운가 자연스러운가의 차이고, 단기적이냐 장기적이냐의 차이다. 억지로 하는 일은 부담이 되어 금세 질이 떨어진다.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 공부를 내던져버리는 학생이 많은 이유다.


프로그래밍 문제를 풀 때도 그렇다. 나와 코드의 관계 (1), 코드와 문제의 관계 (2), 나와 문제의 관계 (3). 이 관계를 한 몸으로 조화롭게 구현했을 때 각각의 존재가 충실한 의미를 갖는다. 계산 결과를 동일하게 내는 코드라도 코드의 짜임새가 큰 차이를 보인다. 관계를 무시하고 맞추는 과녁은 맞더라도 억지로 맞는다. 정답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 후에 존재가 온다. 그럴 때에 질 (quality)이 나온다. 짜임새다. 과녁을 맞추려 애를 쓸 수록 관계는 파괴되고, 정작 정답의 질이 떨어지는 결론을 맞는다.


독자가 오른손잡이라고 가정하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 보자.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바는 그대로 손가락의 근육이 전달받는다. 글을 쓰는데 해야 할 일은 어떤 심상을 떠올릴 것인가 뿐이다. 손가락의 근육에 일일이 신경쓰지 않는 경지다. 반면 왼손으로 글을 써 보자. 같은 글을 쓰는데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떠올렸더라도 손가락에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여야만 글이 나온다. 결과도 훨씬 삐뚤빼뚤하다. 오른손은 무위의 경지에 이르렀고, 왼손은 그러지 못했다. 오른손과 왼손에 유전자 차이가 있는가?


악기를 연주한다고 하자. 오른손으로 글 쓰듯 연주하는게 좋을까, 아니면 왼손으로 글 쓰듯 연주하는게 좋을까? 처음에는 왼손이다가 점차 오른손의 경지에 이른다. 악기에 어느 정도로 익숙해지고 나면 더 이상 손가락의 움직임에 신경쓰지 않는다. 연주자는 오로지 어떤 음을 낼 것인가 하는 심상에만 주의를 둔다. 손가락은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해당 음악의 문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가 입으로 모국어를 말하면서 문법을 틀릴까봐 애쓰지 않음과 같다. 같은 수준을 연주자는 손가락으로 성취한다. 오로지 어떤 내용을 말할 것인가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면 입이나 손가락은 그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왼손으로 글을 쓰듯 의도하여 악기를 연주하면 오래 가지 못해 팔이 아프고 소리도 둔하게 나온다. 펜과 내가 분리된 느낌처럼 악기와 내가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얼마나 높은 결과를 내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마음을 따르는가 이다. 관계지향적인 공부다.

관계는 따르는 것이고, 존재는 추구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따르는 훈련이 알아차림 (Awakenings)이다. 알아차림을 통해 예민해진다. 관계에 대한 예민함, 깨어있는 마음이다. 음악이나 수학,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목표와 나 사이의 관계가 있다. 그 관계를 예민하게 알아차려 의도하지 않은 그대로 따르는 연습이 선(禪) 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휴가를 가다 보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다. 차를 타고 가면 항상 어딘가에 갇혀있는 꼴이 되며, 이에 익숙해지다 보면 차창을 통해서 보는 모든 사물이 그저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일종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되어, 모든 것이 화면 단위로 지루하게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뿐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보면 그 화면의 틀이 사라지고, 모든 사물과 있는 그대로 완벽한 접촉이 이루어진다. 경치를 바라보는 수동적인 상태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완전히 경치 속에 함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현장감은 사람들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발아래 12~13센티미터 지점의 윙윙거리는 콘크리트 바닥은 발을 딛고 걸을 수 있는 실재하는 그 무엇, 실제로 바로 발밑에 있는 그 무엇으로 살아난다. 달리는 중이기 때문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어 바라볼 수 없더라도 어느 때건 발을 내딛고 그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살아난다. 말하자면, 모든 사물과 모든 체험은 즉각적인 의식과 결코 격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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