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니스홍 Mar 15. 2019

목표

목표는 도구다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나만의 꿈. 꼭 이루면 좋겠다. 목표를 적어서 책상에 붙이고 매일 다짐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당장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한시간만 게임하고 다시 앉기로 한다.

목표는 헛발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으로부터 저 먼 곳에 두는 표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활을 당기지 않으면 표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표적 없이 활이라도 당기는게 더 생산적이다. 화살이 아무데나 떨어진다 한들 적어도 팔 힘을 키우든지 뭔가 하기는 한 것이니까. 목표는 무엇인가. 표적, 과녁이다. 목표를 활의 과녁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면 목표의 용도를 물어보자. 활을 쏘는데 과녁이 왜 필요한가.


과녁이 있으면 나와 과녁 사이에 가상의 길이 생긴다. 나와 과녁의 관계다. 그 길을 따르도록 나는 활을 당긴다. 활을 잘 당기면 화살은 잘 나간다. 이미 떠난 화살은 내가 손댈 영역이 아니다. 당장 내 팔로 당기는 활이 그 길을 따르는가를 보기 위해, 길을 드러내는 가이드라인으로 목표가 유용하다는 말이다. 목표는 종착지가 아니다. 도구다. 길을 이미 봤다면 목표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길 위에 있는가 벗어나는가를 아는게 더 중요하다. 목표는 종착지라서 중요한게 아니라 길을 보기위한 도구라서 유용하다. 화살을 꽂아서 얻는 점수가 중요하다는 진한 강조표시가 아니다. 헷갈리지 말자.

길을 이미 봤다면 과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아래 그림을 보자. 목표 (GOAL)라 쓰인 깃발은 우리의 상식에 오른쪽 끝에 꽂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이다. 삶을 속인다. 목표를 꽂아서 결국에 봐야 할 것은 내가 달리는 중인 차선을 밟고 있는가 아닌가다. 내가 길에서 벗어났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는 길을 봐야 하는데, 그 길을 보이는데 보조도구로 사용 후 버리는게 목표라는 말이다. 과녁이 아니라 차선이다.

차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작을 해준다.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핸들을 돌린다. 엑셀러레이터는 동기 (motivation)이고, 핸들은 지향 (orientation)이다. 속도도 방향도 중요하다. 그런데 도중에 사고없이 운전하려면 목표 (goal)가 필요하다.

내가 길에서 벗어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길을 봐야 하는데, 그 길을 보는데 사용하고 버리는 도구가 목표다

모르는 것 (unknown)과 아는 것 (known) 의 경계에 배움 (learn)이 있다. 이미 아는 지식에 의존하는건 마치 뒤를 보면서 앞으로 운전하는것과 같다. 앞을 보지 못하니 핸들이 휜다. 편견이 고착되고 길에서 벗어난다. 또 먼 미래에만 눈을 두는 건 마치 목표만을 보면서 운전하는것과 같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데 부산을 보면서 운전한다는 말이다. 중간에 사고가 난다. 목표와 나 사이에 놓인 길을 선명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적 추억의 게임을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본다. 키패드를 조작해 게임 캐릭터를 앞으로 보내고 뒤로 보내는데 정작 모니터는 고정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나무가 뒤로 가는것처럼 보이는것과 같다. 화면에서 움직이는건 배경이다. 캐릭터가 아니다. 캐릭터가 배경이라는 맥락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알아야 내가 어디로 갈지를 알 수 있다.

인생도 이와 같다. 내가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변한다. 사람은 맥락 속에 있다. 배경을 무시하고 혼자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어디로 가겠다는 목표보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목표가 보여주는 길을 말한다. 미래를 내가 어떻게 만들겠다는 꿈은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듯,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본다. 세상을 무시하고 자기 존재가 부각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 세상의 어느 지점에 내가 있을 뿐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를 물어보자. 길을 보자. 맥락중 어디에 애가 있는가를 물으면 길이 보이고, 당장의 좋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당장의 좋은 의사결정이 쌓이면 길을따라 잘 나아가는 화살이 된다.


인생은 길이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길 위에서 중요한 건 내가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지향 (orientation)하는 방향이 길 위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신이 인간에게 최초로 물어본 물음이다. 길이란 무엇인가. 학교공부가 재미없는데 그만두고 창업을 해야할까 아닐까를 속시원히 알려주는 정답지일까?


공무원 시험을 목표로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에 붙으면 목표를 달성한 것이고 떨어지면 달성 못한게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길을 보기 위해서 사용하는게 목표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시험이라는 것에 닿기까지 중간에는 어떤 길이 있었나 물어보자. 길을 보기 위해서 목표를 사용했나, 아니면 목표를 위해서 길을 희생했나. 목표는 도구라고 했다. 도구의 원래 용도대로 사용한 것이 맞나.


세계는 존재와 관계로 이루어진다. 나 하나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눈에 보이지않는 수많은 관계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다. 존재는 활을 당기는 과녁이고 관계는 둘 사이의 관계다. 과녁을 위해서 관계를 희생하면 어떻게 되나. 돈을 위해서 친구관계를 희생하는 것과 같다. 길은 없고 나와 과녁만 있을때 둘의 관계는 끊어진다. 길이란 곧 나와 그의 관계다. 그러니 길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나와 너의 관계, 나와 신의 관계, 나와 부모의 관계, 그런 관계를 끊는다는 말이다.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생물은 없다. 관계가 곧 길이다. 관계를 끊으면 길을 잃는다. 그러니 목표가 있어도 길을 보지 못하면 목표는 그 쓸모를 한 것이 아니다. 목표를 마치 정 가운데 꽂아야 하는 것처럼 보는 건 어긋난 비유다. 길을 못 보는데 종착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위에서 길을 이미 봤다면 과녁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는 길을 보지 못하면 과녁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럼 결론은 무엇인가.

과녁은 의미가 없다. 길이 문제다.
“발사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나에게 충고했다.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당기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눈이 쌓이면 대나무 잎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이지요. 그러다가 일순간 잎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데도 눈이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이와 같이 발사가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최대로 활을 당긴 상태에 머물러 있으세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최대로 활이 당겨지면, 저절로 화살이 나갑니다. 발사는 사수가 의도하기도 전에, 마치 대나무 잎에 쌓인 눈처럼 사수를 떠나가야 합니다.”
                                                                                         -마음을 쏘다, 활. 오이겐 헤리겔








작가의 이전글 찌꺼기 수집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