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된 교육이 의미하는 바
한국 교육이 실패했다는 것에는 반론을 제기하기가 더 어려울 지경으로 한국 교육은 실패했다. 그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라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중 하나를 짚어보자. 아래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을 대비해 본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도 매우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두 장면을 그려보았다.
왼쪽부터 보자. 선생이 제자보다 반 보 앞서있다. 선생은 제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보아주며, 제자가 스스로 깨우칠때까지 자신이 직접 몸으로 보여준다. 보여주고 (to show) 보아주는 (to see) 사람이 선생이라고 했다.
선생은 자신의 색깔을 파랗게 내놓는다.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기예를 보여준다. 제자는 교사를 보면서 자신의 색깔을 노랗게 내놓는다. 허접하지만 아무튼 선생을 따라서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기예를 꺼낸다. 제자가 꺼낸 것을 선생은 보아준다. 제자와 선생의 결과물은 색이 다르다.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닮는다. 선생과 제자이기 때문이다. 선생이 하는 바로 그런 식으로, 제자는 어릴 적부터 생산자의 역할을 맡는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색과 맥락을 유지하며 성인이 되어서는 단지 이전보다 발전된 형태의 같은 것을 내놓는다. 선생과 제자는 서로가 자기 것을 생산하며, 서로가 서로의 것을 소비한다. 생산과 소비가 온전한 균형을 이룬다. 둘의 시선의 높이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오른쪽을 보자. 교사는 학생과 멀찍이 떨어져서 자기 것을 쏟아놓는다. 학생은 교사가 쏟아놓는 것을 받아적는다. 교사가 내놓는 것의 상류가 아니라 다 쏟아내놓은 하류의 결과를 본다. 소화하기 어렵다. 시선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교사는 생산하고 학생은 소비한다. 한 쪽은 일방적으로 생산하며, 한 쪽은 일방적으로 소비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 구분이 명확하다.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온다. 둘의 시선의 높이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을 하면 병사의 눈높이와 장군의 눈높이가 다르다. 병사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 바로 눈앞의 적을 베는 것 말고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장군은 말 위에서 큰 그림을 본다. 때로는 말 아래에서 병사의 눈높이로 싸우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 위에서 전체 판세를 그린다. 유능한 장군이다. 필요에 따라 자기 시선의 높이를 조절할 줄 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시선의 높이가 반 보 차이로 균형을 유지하도록 자기가 변하는 일. 리더가 하는 일이며 배운 사람이 하는 일이다.
배운 사람이라는 말은 머리에 학식이 많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를 혼낼 때 종종 못 배운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 그런 말을 하는가. 주위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 그런 말로 혼낸다. 아이에게 배려가 왜 없는가. 나의 눈을 다른 사람의 눈에 맞출 생각이 없을 때에 배려없음이 행동으로 나온다. 나의 시선을 조절해서 남의 시선으로 맞추지 못하면 못 배운 사람이라는 말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그저 착하게 살라는 도덕책에 국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학이나 영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사물의 운행 방식을 이해하려면 나의 눈높이를 그 사물의 입장, 심지어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바꾸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연습이 되지 않으면 만년 피상적인 기술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도(道)가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력으로 무능한 것은 물론이다.
인성이 좋지 않아도 말재간으로서의 영어점수까지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도를 트려면 그 영어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수학점수까지도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표현을 혼자 잘나서 사용한다면 그것으로 면접관을 어떻게 설득해 취업을 할 수 있을까. 결국에 사람과 엮이지 않는 기술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과 관계없어보이는 어떤 분야라도 현실적으로 보아서 다른사람이 납득해 돈을 내고 구입해야만 그 쓸모를 한다. 기술자가 사람의 눈높이에 무관심하면 기술의 끝에 닿을 수 없다는 말이다. 기술 (奇術)이 있어도 기예 (技藝)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병은 의사가 맡고 법은 판사가 맡는다. 분업화가 심화되면서 각자의 전문 영역을 따로 맡아 집중적으로 계발한다. 덕분에 사람 하나가 모든 역할을 다 맡던 과거에 비해 효율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뭐든지 도가 지나치면 역효과를 부른다. 일례로 현대 사회의 교육은 그 정체성을 잃었다. 정체성이 훼손된 존재는 그것이 설 자리를 잃는다고 했다. 정체성이 왜 훼손되는가. 그 정체성을 정의하는 수준 이하로 분단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육이라는 개념의 정체성을 훼손할 만큼의 분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생산자-소비자 역할의 극단적인 분업이다.
선생의 시선으로 교육을 받은 제자는 또 다른 타인의 시선의 높이로 자신이 이동하는 법을 배운다. 강의의 상한 (上限)이 공감이라 했다. 내가 아닌 그와 입장을 동일하게 놓는 연습이 공부다. 입장이 분리되면 공부할 수 없다.
"오랜 강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가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 분들은 가르치는 것을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모르던 것을 이야기만 듣고 알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그림을 보여드리면 여러분은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앨범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찾아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설득하거나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의문을 갖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공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닙니다. 공감, 매우 중요합니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것은 가슴 뭉클한 위로가 됩니다. 위로일 뿐만 아니라 격려가 되고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라고 합니다. 음모라는 수사가 다소 불온하게 들리지만 근본은 공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작 불온한 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소외 구조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음모는 든든한 공감의 진지입니다. 소외 구조에 저항하는 인간적 소통입니다. 글자 그대로 소외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실이 공감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신영복, 담론.
비단 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개인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한 몸에서 균형잡는게 아니라 극단적인 생산자로서의 개인과 극단적인 소비자로서의 개인으로 분단되어 버렸다. 사람의 몸 한 단위 (unit)에서는 먹기와 싸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나의 온전한 인간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먹기만 하거나 싸기만 하는 인간으로 역할이 나뉘어 버린 것이다. 극소수의 극단적인 생산자와 대다수의 극단적인 소비자로 계층이 나뉘었다. 극단적인 소비자는 감기에 걸리면 혼자 해결할 줄 몰라 의사에게 돈을 바친다. 분쟁이 생기면 혼자 해결할 줄 몰라 변호사에게 돈을 바친다. 아는게 없으면 혼자 해결할 줄 몰라 학원에게 돈을 바친다. 자신이 자신의 쓸모를 알지 못한다. 생산-소비 극단화라는 현상은 교육분야 한정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교육은 그 중 일례일 뿐이다. 현대 사회 대다수의 분야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