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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09. 2019

별을 타다

공부는 별과 별 사이를 건너다니는 연속된 체험이다.

위 그림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Richard Feynman)의 이야기다. 별 하나하나는 지식이다. 경계 왼쪽의 별들은 인류가 알아낸 지식이고, 경계 오른쪽의 별은 인류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지식이다. 


이 별과 저 별을 사용해 다른 별로 이동하는 법을 알면 처음에 스스로 발견한 별은 뻔하게도 현재 인류의 지식 범위 안에 있다. 바퀴를 재발명하는 듯한 일이다. 이미 있는 것을 또 만드는 결과이므로 유용하지 않다. 실망한 나머지 다른 별로 이동하기를 관두고 별을 많이 모으는데 애쓰게 된다. 누가 별을 더 많이 모았는가를 두고 경쟁한다. 오해다. 별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부는 별과 별 사이를 건너다니는 연속된 체험이다. 


이번에 이 별을 스스로 발견하고 다음에 저 별을 스스로 발견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아무도 발견한 적 없는 별을 내가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한편 기존의 별을 열심히 모으는데만 관심을 두면 별을 타고 다른 별로 이동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영 경계의 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다. 공부를 하든 연구를 하든 마찬가지다. 기존의 별이 있어야 다음 별로 이동할 수 있으므로 기존의 지식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공부는 어디까지나 별을 타고 가는 여행의 길이다. 별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다. 많이 가져야 하거나 많이 알아야 한다는 소유욕을 버려야 공부할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여정은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1746년에 이미 발견된 베르누이 수(Bernoulli Numbers)를 발견하고, 그 다음에는 1889년에 발견된 것을 발견하고, 1921년에 발견된 것도 발견하고…그러다 보니 내가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이미 증명한 것을 직접 증명하다 보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점점 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 수도 있다.
                                                                                                          - 파인만의 물리학 길라잡이 p.39


이런 의문도 있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구글링을 하면 전세계 어느 정보든 수집할 수 있는 세상에 학교 수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수백년 전에는 배운 사람이 극소수였으므로 마을의 성직자가 곧 의사이면서 교사이면서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였다. 지식의 양이라는 것이 현대에 비할 바가 못 되어 사람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할만했다.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해당 직업의 본분과 거리가 먼 역할부터 하나씩 분할되었다. 의사의 역할은 의사가, 철학자의 역할은 철학자가 가져갔다. 그러면서 성직자는 성직자의 본분에, 의사는 의사의 본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한 마을의 교사 하나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훈육, 양육, 지식전달, 인성계발 등. 구글이 제공하는 지식전달의 역할은 너무나 독보적이라 한 명의 교사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섰고, 지식전달의 부분이 인터넷으로 이관되었다. 이 말은 지식전달이 교사의 본분과 가장 거리가 먼 역할이었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지식전달의 통로라 여겨지던 수업 (course)은 이제 한물간 유물일까? 


학생들은 커서 직업을 가질 것이고, 직업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든 생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크던 작던 뭔가를 만들어 사회에 제공해 대가를 벌어야 본인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하나가 모든 면에서 maker일 수는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maker여야 살아갈 수 있다. 


maker는 소비자 (consumer)와 다른 개념이다. 
maker는 자기가 만든 물건에 책임 (Responsibility)을 진다. 반면 소비자는 권리 (Rights)를 주장한다. 
maker는 제공함으로 대가를 받는다. 소비자는 자격을 증명함으로 대가를 받는다. 


교사는 학생을 결국에 어떤 분야로의 maker로 만드는 사람이다. 어떻게? 지식전달이 교사의 본분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아래 그림을 보자.

교사는 학생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to show) 반면, 구글은 학생이 원하는 것을 쌓아준다 (to stack).

교사는 학생이 멈칫거리다 결국에는 도전하도록 (to challenge)돕는 반면, 구글은 학생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제공한다. 

교사는 학생이 스스로 조직화 (to organize)하도록 돕는 반면, 구글은 학생이 원하는 것을 수집하도록 (to collect) 해준다. 

교사 본인이 학생의 롤모델이 된다. 학생과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살아있어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반면 구글 속의 위인은 이미 예전에 죽었거나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 체감하기 어렵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본분이 이것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보여주고 (to show), 학생이 한 일을 보아주는 (to see) 사람이다.


본다 (see)는 단어의 뜻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위 글에서 보듯 교사는 학생에게 보여주고 (to show), 학생이 스스로 도전하도록 격려하며, 학생이 스스로 해낸 일을 보아주는 (to see) 사람이다. 필자는 인공지능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단언하건대 앞으로 인공지능 아니라 어떤 정보기술도 교사의 핵심적인 본분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규격화되지 않은 사람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별을 타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별을 수집하도록 돕는 것은 구글이다. 구글이 가장 잘 하는 일이면서, 그 한계도 명확한 일이다. 배움은 별 수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새로운 별을 동경하도록 학생의 마음에 소망을 보여주고 (to show), 학생이 제시한 여행길을 보아주며 (to see), 기존의 별을 딛고 새로운 별로 모험을 떠나도록 격려하고 (to challenge), 그 여행길을 스스로 자아내도록 (to organize)돕고, 학생의 등을 떠미는게 아니라 교사가 함께 탐험하며 학생과 연대하는 일. 그게 교사의 본분이다. 교사는 공문서 작성 말고도 할 일이 많은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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