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공부법
오늘은 그만 놀고 공부를 해야지 마음먹으면 그제야 잠이 솔솔 온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다. 아무리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왜 그럴까. 성적은 잘 받고 싶은데 공부하기는 싫다.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공부하는 법을 이해하는데 사람과 관계맺는 법에 비유를 들면 잘 맞는다. 아래 그림을 보자.
왼쪽 그림은 새가 알을 품는 그림이다.
가운데 그림은 이쪽과 저쪽이 관계없고 관심도 없다는 그림이다.
오른쪽 그림은 관계있으나 뭔가 이상하다. 손에 쥐고 있지만 쳐다보기 싫은 그림이다.
이 세 가지 장면이 우리가 공부할 때 보이는 세 가지 모습이다.
품는다는건 무엇인가. 새가 알을 품거나 부모가 자식을 품듯, 품는다는 단어에는 하나됨이 있다. 불쌍해서 돕는 적선도 아니고 힘으로 지배하는 통치도 아니다. 품는다는 단어는 사랑의 표현이다. 너와 나를 구분짓지 않겠다는 실천의 몸짓이다.
우리는 언제 나 아닌 것을 품는가. 품는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새는 온 몸의 털로 알을 품는다. 부모는 자신의 모든 것으로 자식을 품는다. 품는 대상을 감싼다. 무엇으로 감싸나. 자신의 모든 것으로 감싼다. 둘러싼다. 강한 압박이 아니라 부드러운 보살핌이다. 오로지 품는 대상의 안위를 위주로 내 행동을 결정한다. 너무 강해도 안되고 너무 약해도 안된다. 혹여 다칠까 내가 애탄다. 품는 마음이다.
실습을 해 보자. 냉장고에서 달걀을 하나 꺼낸다. 이불이나 두꺼운 옷으로 품어보자. 어떤 느낌인가. 이불로 덮어놓고 옆으로 치우는게 아니다. 갓난아기를 보살피듯 지긋이 바라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달걀의 표면에 점이 보인다. 매끈한듯 했지만 실은 미세한 울퉁불퉁함을 본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 느낌으로 공부한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경험이 공부다. 배운다는 뜻이다. 품은 결과다. 달걀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하나하나 처리하는 공장이 아니다. 많은 양을 욕심내면 배우지 못한다.
다도 (茶道)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차 한 잎을 우려서 찻잔에 반만 담고, 그마저도 입에 넣어 바로 삼키지 않는다. 입 속에서 차를 지긋이 품는다. 그런 후에야 삼킨다. 몸으로 차를 품어 이해하는 과정이다. 대량을 벌컥벌컥 들이켜서는 깨닫지 못하는 앎이다. 단 한 입거리 찻잔에 앎이 있다. 품는 대상에는 마음을 일부러 쓸 필요가 없다. 이미 마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하기 싫은 이유는 그것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품을줄 아는가는 가진 지식의 양과 무관하다. 배운 것 없는 아기들이 많이 배운 어른보다 사물을 훨씬 잘 품는다. 집나간 자식도 마음으로 품으면 그리워하듯,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는가와도 무관하다. 공부도 그와 같다. 사랑하면 품게 되고 품게 되면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다. 아주 섬세히 보므로 아주 자세히 보인다. 하나로부터 수많은 앎을 얻는다.
가운데 장면을 보자. 공부를 품지 않으면 너와 내가 구분된다. 바쁜 도심길에 스쳐가는 사람처럼 아무런 맥락도 감동도 없이 그저 지나간다. 나와는 상관없고 관계없으며 관심도 없다. 그와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없음은 물론이다. 공부하지 못한다.
나아가 공부를 책임이나 의무, 성과를 내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 인식하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경우다. 오른쪽 장면을 보자. 어떤 이유로 손에 달걀을 쥐고 있지만 쳐다보기는 싫은, 몸과 마음이 분열된 모양새다. 예컨대 당장 돈이 급해서 평소에 불편한 친구에게 부탁하느라 관계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하자. 돈이 필요하니 이용해야 한다.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그 결과로 만날 상황마다 그를 피해다니게 된다. 어떤 이유로 동석이라도 하려면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을 뿐이다. 그와 함께한 추억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배척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눈을 감은 것도 모자라 외면한다. 그 마음이면 내가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얼마나 깊게 볼 수 있을까. 공부도 이와 같다. 겉으로 이용하고자 할 수록 실제로는 그를 밀어낸다.
어떤 분야가 유망하다거나, 취업이 잘 된다거나, 어떤 강의가 가성비가 좋은가, 또는 어떤 교과서가 더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더욱 중요한 문제다. 내가 그를 품는가, 무관심한가, 나아가 이용하는가의 문제다.
당신은 공부를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