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깊이 안다는 말의 의미
아래 그림을 보자. 네 가지 그림이 있다. 좌상단의 피부가 검은 사람을 보고 검다고 말하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음에도 지탄을 받는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피부색 뿐 아니라 성격, 생각, 말투, 행동, 습관 등등 이루 다 셀 수 없는 다양함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 많은 경우를 다 무시하고 피부색만으로 사람을 구분짓는다면, 사고방식이 편협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상단의 파이 (Pi)를 보고 우리는 마찬가지 논리를 펼친다. 파이의 값은 3.14라는 것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사람을 상대로 말하는게 아니니 지탄을 받을 일 까지는 아니지만 편협한 사고인 것은 분명하다. 파이는 서기 250년전의 이집트 문명에서도 사용하던 개념이다. 그 유구한 역사를 지나 현대까지 사용되는 개념이 3.14라는 값 말고는 할 말이 없을까? 파이에게 인격이 있다면 가슴을 치며 통곡할 일이다. 우리는 수학 시간에 인종차별하는 법을 배운다.
우하단의 사과를 보자. 사과는 우리의 상식으로 색깔이 빨갛고, 입에 넣으면 단 맛이 나며, 모양은 둥그스름하게 생겼다. 정도를 재어보자면 빨강은 3정도로 진하게 빨갛고 단맛은 5 정도, 둥근 정도는 2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확히 컴퓨터가 사과라는 개념을 저장하는 방식이다. 사과를 해석하는 관점의 갯수가 다양할수록 그 개념을 보다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해의 깊이를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날 사과농장 주인이 등장한다. 사과농장을 일구는 농장주라면 우리 일반인이 사과에 대해 아는 관점의 갯수보다 훨씬 다양한 관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어떻게 되는지, 눈이 오면 어떻게 하는지, 판매할 때 값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등, 일반인의 상식이 고작 세 가지 관점으로 사과를 이해한다면 사과농장 주인은 수십 수백가지의 서로 다른 관점으로 단 하나의 사과를 이해한다. 당연하게도 사과농장 주인이 일반인보다 사과에 대한 이해가 깊다. 이 단어가 중요하다.
이해의 깊이에 대하여 논하는 중이다. 이해가 어느 정도로 깊은가는 그것을 보는 관점을 얼마나 다양하게 알고 있는가로 재어볼 수 있다. 이해가 깊으면 곧 그것에 대해 유능하다. 사과농장 주인은 비가 와도 대처할 줄 알고 눈이 와도 대처할 줄 안다. 비와 사과의 관계, 눈과 사과의 관계를 모두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와 사과의 관계를 모른다. 비가 오면 농사를 망치고 눈이 와도 농사를 망친다. 무능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결국에 유능해지기 위해 학교에 다닌다. 졸업 후 유능함을 발휘해 돈을 벌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사과농장 주인이 되어 졸업하는가. 파이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관점을 알고 졸업했는가.
깊은 이해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성이다. 깊이 안다는 뜻은 곧 다양하게 안다는 뜻이다. 넓이가 깊이를 정의한다. 한 분야를 깊게 파는 연구를 하는 사람은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博士)학위. 한자의 뜻을 검색하면 넓을 박(博) 선비 사(士) 이다. 깊은 연구를 하는 사람을 넓다는 의미의 단어로 정의한다. 이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뭔가를 깊게 이해한다는 의미는 그것과 그 주변 존재들의 넓은 관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잡다한 상식이 많아서 넓은게 아니라, 하나에 대해서 넓게 알면 그것이 곧 깊이라는 뜻이다.
이번에는 좌 하단의 영어 단어를 보자. 사과가 들어갈 자리에 이번에는 나 (I)를 집어넣는다. 나는 성인이 되는 스무살 무렵까지 부모의 관점으로 자식인 나를 보고, 선생님의 관점으로 학생인 나를 보고, 친구의 관점으로 친구인 나를 본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번 물어보자.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알고 있나?
위에서 논했듯, 비가 오거나 눈이 왔을 때 사과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사과농장 주인의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학교, 학원, 집. 이 세 가지 말고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관점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묻는 말이다. 비를 맞아본 적이 있나, 눈을 맞아본 적이 있나, 혹 비가 오면 농사를 망치고 눈이 오면 농사를 망치는 것 아닌가.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유능한가? 나는 나를 일구는 유능한 사과농장 주인인가?
사람이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뿐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미래를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 환경을 바꾸지 않으려 애써도 자신의 몸이 늙는 변화를 반드시 맞는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망상이다. 세상은 변한다. 나도 변한다. 어떻게 변할지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를 목전에 두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일수록 준비를 하려 애쓴다. 준비는 앞 일을 안다는 보장이 있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보존되는 인위적인 규칙성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미래는 준비하는게 아니라 대비하는 것이다. 무엇이 올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사과농장 주인도 사람이니 마찬가지로 미래를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비가 와도 대처할 줄 알고 눈이 와도 대처할 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가. 비를 맞아본 적이 있고 눈을 맞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안다. 내가 내 삶으로 겪은 바가 다양할수록, 그 어떤 미래를 맞아도 내 힘으로 과거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전에 어지간히 해 본 일들이기 때문이다. 유능하다는 말이다.
사과농장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를 맞아보고 눈을 맞아봐서, 나에 대한 가능한 많은 관점을 과거의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미래가 아무리 다양한 형태로 덮쳐온다고 해도, 이것도 이미 해본 일 저것도 이미 해본 일이면 그때마다 요령껏 대처할 수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유능하면 그렇게 된다.
성경이나 신화에 나오는 영웅 스토리는 어떤 전형적인 플롯을 따른다. 부족함 없이 자라서 어느날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광야에 간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깨달음이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고국으로 돌아와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모세가 그랬고 석가모니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크게 나누면 분리, 입문, 회귀의 3단계, 자세히 나누면 12단계로 나뉜다.
하나의 인간에게 광야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관계 (가족, 친구)를 일시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끊고 혼자가 되는 곳으로 간다. 거기서 다른 관점으로 자신을 재정의한다. 광야가 그 현장을 상징한다. 40일이든 40년이든 호된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사과농장 주인이 된다. 비가 와도 대처하고 눈이 와도 대처할 수 있다. 그가 자기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마을 밖을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세 가지 관점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사과농장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넘어지고 눈이 와도 넘어진다. 광야에서 돌아온 그는 남들이 넘어질 때 본인은 넘어지지 않으므로 자연히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깊이가 사과농장 주인의 정도가 되면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이상 삶을 흔들지 못한다. 무엇이 오든 대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 대하여 얼마나 유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