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울 것인가 덜어낼 것인가
나이가 들면서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왜 사는가 하는 물음을 가져본 적이 있다. 진학이나 취업, 이직 때마다 나에게 맞는 길인가를 알아야 결정을 하는데 내가 나를 모르니 결정할 수 없다. 자기를 알아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오해하지 말자. 아는 방법이 아니다. 알아가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래 그림의 왼쪽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 피규어 (인형) 시리즈를 모으는 중이라 하자. 시중에 출시된 모든 컬렉션을 모으고 희귀본에 소장본 한정판까지 모조리 수집했다. 그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가 "완전히 다 모았다"이다. 꽉 채워 달성했으므로 그 이상 더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완전함 이상의 채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개가 부수적으로 더 있더라도 기존 것과 중복이 되므로 완전함보다 더 채움은 무의미하다. 집단이 집단으로 불리는 상한 (上限)이다.
피규어의 집단을 말할때는 피규어의 종류가 다양해야 건강한 집단이다. 품질의 척도를 다양성 (diversity)으로 잰다. 똑같은 피규어가 두개 이상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 남는 피규어는 누굴 줘버려도 아쉽지 않다.
다른 예를 보자. 아래 그림의 오른쪽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 피규어 (인형) 시리즈를 모으는 중이라 하자. 어느날 명절에 사촌동생이 놀러와서 내가 좋아하는 피규어 하나를 밟아 뭉개버렸다. 그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가 "온전하지 않다" 이다. 원래 있어야 할 부분이 없다는 뜻이다. 피규어 인형 하나는 그 자체로 온전한데, 밟아서 그 형태를 뭉갬으로써 온전하지 않게 되었다. 온전함 이하의 덜어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을 잃게 한다. 존재가 존재로 불리는 하한 (下澣)이다.
존재는 그 정체성이 일관되어야 건강하다. 품질의 척도를 일관성 (consistency)으로 잰다. 여기서 A 였으면 저기서도 A여야 같은 존재다. 여기서 정체가 다르고 저기서 정체가 다르면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피규어의 정체성은 그 형태에 있으므로, 형태가 뭉개진 피규어는 이제 반짝이는 장식장이 아니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어떤 존재든 그 정체성을 잃으면 그 자리를 잃는다. 요약해보자.
완전함은 그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온전함은 그 이하로 뺄 것이 없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같은 맥락의 다른 예를 보자. 물 분자가 하나 있다. 수소 두 개에 산소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 화학 상식이다. 물 분자에서 수소나 산소가 하나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더 이상 물이라 부르지 않는다. 존재의 하한선 이하로 빼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물 분자의 양이 2L 있다면 그냥 같은 것이 많이 모였을 뿐이다. 이 상태에서는 물 분자 하나를, 그 존재의 정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물분자를 들여다보는데 2L짜리 물통을 현미경에 올려놓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많은 양은 존재의 정체를 밝히는데 방해가 된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군은 다양할수록 건강한 생태계를 이룬다. 생물 상식이다. 인위적으로 유지하는 멸균실은 건강하지 않은 공간이다. 다양성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집단의 품질로써는 불합격이다. 이 상태에서는 생태계의 성질을 알아내기 쉽지 않다. 생태계라는 개념은 집단 안에서 서로 다른 개체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태계를 관찰하는데 소독제를 먼저 뿌리지는 않는다. 있는 다양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요약해보자.
집단은 완전함을 상한의 완성으로 보고 존재는 온전함을 하한의 완성으로 본다.
집단은 품질은 다양성으로 재고 존재의 품질은 일관성으로 잰다. 각각 완전함과 온전함의 정도를 말한다.
완전함과 온전함에 대하여 논하는 중이다. 이제 이 논의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 보자. 나는 개인이다.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다. 따라서 하한으로 향하는 길의 끝을 완성으로 보며, 일관성을 그 품질로써 잰다. 팔다리를 하나씩 덜어내 보자. 팔다리가 없는 나도 여전히 나 이다. 피규어와는 달라서 팔다리의 유무가 사람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얼마만큼 덜어내도 나는 여전히 나 인가. 물어보고 덜어낸다. 또 물어보고 또 덜어낸다. 덜어내다가 나 라는 존재의 일관성을 훼손하기 직전의 시점에 남아있는 내가 바로 나의 정체다. 이상적인 하한선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곳에 닿기까지는 일생이 걸려도 모자라다. 도(道)를 수행하는 과정이다. 도는 길이다. 시작점도 목적점도 아니다. 하한을 향하여 덜어내며 전진하는 길(道)이다. 어떤 존재의 무엇을 얼만큼 덜어낼 수 있는가를 살펴 덜어내는 행위가 공부다.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아서 그만큼을 덜어내고, 또 자세히 들여다보아서 또 덜어낸다. 나 외의 것을 덜어내든, 작품 외의 것을 덜어내든, 존재가 존재이기 위한 정체성 이외의 것을 덜어내는 행위가 공부다.
이제 개인과 집단으로 구분했던 논의를 서로 연결해보자. 피규어 집단을 완전히 수집했다고 해도 그 중 하나가 온전하지 않은 피규어라면 속이 상할 것이다. 한편, 온전한 피규어들을 많이 모았다고 해도 아직 수집하지 못한 피규어가 있다면 다양성이 상한을 채우지 못해 아쉽다. 개인과 집단은 그렇게 관계된다. 개개의 온전한 피규어들이 다양하게 모일수록 완전한 피규어 콜렉션을 향해 나아간다. 하한을 향하는 개인이 모여 상한을 향하는 집단, 문명을 이룬다. 개인이 온전함을 향하므로 집단이 완전함을 향한다.
인류의 역사에 남는 선각자들은 일생을 통해 쌓기보다 덜어내기를 택했다. 개인으로서 온전한 하한을 향해 갔던 것이다. 완전함을 향하는 건 건강한 집단이 하는 일이지 온전한 개인이 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온전함을 향하여 덜어내는 생을 살았다. 온전한 개인 1과 또 다른 온전한 개인 2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질 터다. 그런 개인이 모이면 건강한 집단이 된다. 그런 집단일수록 상한에 가깝다.
개인은 그 하한을 향하고, 그것으로 집단은 그 상한을 향한다. 인류가 거대한 문명을 이룬 역사는 이 방향으로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온전함으로도 갈 길이 멀고, 완전함으로도 갈 길이 멀다. 완성은 더욱 갈 길이 멀다.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道)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