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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11. 2019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목적

마음이 공허할 때

살면서 마음이 공허할 때가 잦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다. 허망하고 막막하다. 비어있는 기분이다. 원래 있다고 생각했던 목적마저 어디론가 사라진 기분을 느낀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목적이란 무엇인가.

'~~해야 한다' 라고 표현되는 모든 문장이다.

그러면 목표는 무엇인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한다'라고 표현되는 모든 문장이다.

현실에서 나의 목표 (目標)를 이루면 마음에서 나의 목적 (目的)이 달성된다. 목표와 목적의 뒷 글자를 연결하면 표적 (標的) 이다. 눈 (目)을 화살로 삼아 조준하는 과녁이다. 과녁은 당위성이다. 어떤 이유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적은 유용할 때가 있지만 때로 공허함을 부른다.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에 눈을 두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순간을 성취로 가득 채울 수는 없으므로, 목적을 가질 때가 있으면 버릴 때도 필요하다. 혹자는 목적이 없어서 버릴게 없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도 일종의 목적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목적은 삶의 공백으로 남는다. 아래 그림을 보자. 그림의 왼쪽에는 사람과 목적이 분리되어 있고, 때로 공허하다. 채워지지 않은 순간이 길어질수록 빈 마음이 크게 남는다. 그러면 몸 안에는 무엇을 두는가.

사람은 몸과 마음의 분열이 적을 때 온전하다. 그러면 인식되는 시간이 사라진다. 목적에 눈을 두면 순간을 회피하게 되는 반면, 현재의 순간에 정직하게 눈을 두면 나중의 목적에도 끝내 정직하게 닿을지 모른다.


마음에 씨앗을 품으면 씨앗이 자라나 몸과 마음을 하나로 엮는다. 그림의 오른쪽에서는 사람의 속이 가슴에 품은 씨앗이 줄기로 이어져 밖으로까지 자라난다. 씨앗은 곧 사람의 지향 (orientation)이다. 지향을 품는다. 품으면 자란다.

목적과 지향은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동력이다. 외적인 동기와 내적인 동기의 다른 표현이다. 지향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지금의 내가 곧 나중의 나다. 나이를 먹고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성질은 연속적으로 유지된다.  

목적은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는 그런 것이다.
지향은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런 것이다.

사격에는 조준사격이 있고 지향사격이 있다. 목적은 조준이고 지향은 향함이다. 내가 보는 표적을 향하여 발사하면 조준사격이고, 내가 보는 방향을 향하여 발사하면 지향사격이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했던가. 표적을 향하여 빠르게 내달리는 삶보다 지향을 향하여 천천히 걷는 삶이 충실하다. 삶의 방향은 마음의 지향이 향하는 방향일 때 분열되지 않는다. 자신의 지향하는 바를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할 때 자아가 분열된다. 그러면 공허함이 삶의 순간을 채운다. 당장의 공허함으로 견디기 힘들때 몸을 쓰는 일을 하면 도움이 된다. 목적에 붙들릴 시간에 정신없이 몸을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땀흘려 성실히 일하는 농부가 공허함에 사로잡히는 장면과 어울리지 않음으로 알 수 있다. 단기적인 처방이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이면 어릴 적부터 엄마가 사온 오징어 배라도 갈라서 내장을 확인하는 사람이 지향이 맞는다. 예전에 이미 하던 것을 대학 와서 더 발전된 형태로 한다. 모든 삶의 순간들이 연속된다. 반면 어느날 의대 입학식날부터 갑자기 시작하면 원래의 나와 의대생으로서의 내가 둘로 분열된다. 학교 공부는 점수를 위한 목적일 뿐, 지향으로 내 안에 심기우지 않는다. 삶으로 체화되지 않는다. 시험을 잘 보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공부하는 내용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나이는 먹었는데 되돌아보니 한 것은 없고 공허하다면, 분열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돌아보자. 지금 나의 지향과 성질이 같지만 조금 더 발전된 그것을 앞으로 10년 후에도 여전히, 발전된 형태로 하는 중이라면 삶은 농밀하게 채워진다. 장기적인 처방이다.


씨앗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은 관계가 없다. 아기들은 사리분별을 모르기 때문에 당장 자신의 마음에 비치는 지향을 씨앗으로 품어 스스로 키워낸다. 그러나 어른들은 쓸데없이 똑똑하기 때문에 쉽게 거대한 이상을 겨냥한다. 순간이 모여 삶이 되는데 순간을 그까짓것으로 치부한다. 나는 큰 별이 된다는 소리를 하면서 삶의 순간을 비우며 결국에 삶 전체를 빈 공터로 만든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익숙하다. 분기별 목표나 연간 목표를 설정하고 지키는 식이다. 과연 목표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 매년 초마다 다이어트와 영어공부를 목표로 세우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허탈함에 젖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나무 한 그루가 태어나 앞으로 천 년을 살겠다는 목표를 위해서 자라난다고 생각해보자. 살아있는 생물에게는 목표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 생물은 지향 (orientation)을 가지고 있다. 지향 (orientation)은 예컨대 성적 지향성 (sexual orientation)이 대표적이다. 길을 걷다가 자신의 취향인 사람이 지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게 된다.


생물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목표가 아니라 지향이다. 한 사람은 자신의 성적 지향 뿐만 아니라 공부나 취미, 연애, 인간관계의 다양한 면에서 다른 지향을 갖는다. 자신의 지향은 머리가 아니라 끌림으로 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렵지만 끌린다면 그것은 지향이다. 이성적으로 거스르려 애써도 자신도 모르게 향하는 고유한 방향이다. 수학공부를 하는데 이처럼 끌리는 지향이 있다면 어떨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눈이 가듯 어떤 모양의 공식에 자꾸만 눈이 간다면 어떨까. 공부가 쉽고 편안할 것이다. 떨어져있어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 지향이다. 한편, 끌리지 않는데 어떤 현실적인 이유로 그와 장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면 매우 지겹고 답답하다.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를 하라고 강요하면 겉으로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마음으로, 곧 지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학교에서 수십명의 학생을 한 반에 몰아넣고 같은 내용의 수업을 한다. 그 중에 지향이 맞는 학생은 아주 편안히 받아들이겠지만, 지향이 맞지 않는 학생에게는 그보다 더한 고역이 없다. 겉으로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모님 선생님이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다. 합리성으로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다 지향이 맞는 소수의 학생만 수월하게 점수를 얻는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힘겹게 흉내를 내서 점수를 얻는다. 그리고는 졸업 후 다시는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다. 공부하는 과정이 너무나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척 하면서 수십년을 함께 보내는 것과 같다. 억지로 성과는 만들 수 있을지언정 효율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방법이다. 지향을 무시하고 계획을 세우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포기하게 만들던지, 포기하지 않더라도 삶을 되돌아보면서 공허하게 하던지. 운좋은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학생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지향은 바꾸기 어렵다. 삶의 지향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극히 드물다. 예컨대 평안하던 가정에 닥친 불의의 사고는 가족 구성원의 삶의 지향을 하루아침에 바꿔놓는다. 가족 중 누군가가 억울하게 살해당했다면 가해자를 죽이고 싶다는 삶의 지향을 갖는 식이다. 기존의 지향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새로운 지향이 생겨나고 또 합쳐진다. 마치 이쪽 줄기가 성장을 멈추고 저쪽 줄기가 자라나기 시작하듯, 지향도 사람의 마음에서 이렇게 자라고 저렇게 자란다.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따라 세월을 보내면 그 인생에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 (narrative)가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며 한 줄기로 자란다. 그 내러티브가 사람의 공허함에 대한 해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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