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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11. 2019

장기 공부, 단기 공부

공부가 향하는 방향

스타트업을 창업하면 초기에 Valley of Death (죽음의 계곡)를 지난다. 수익 없이 투자자의 자본으로 버티면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든다. 자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수익모델이 검증되면 살아남는 것이고, 그 전에 자금이 다 떨어지면 회사는 망한다. 돈 되는 서비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체 서비스를 내놓으려 노력한다. 자신들의 서비스로 수익모델을 완성해 결국에 생계를 해결하느냐 아니냐 하는 사활을 걸고 일한다.


다른 형태도 있다. 회사의 수익모델이 없고 자본금도 부족하면 다른 회사의 프로젝트성 일감을 떼어와 생존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한다. 직원이 다른 회사 일에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체 서비스를 만드는데 더욱 시간이 걸린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 끝내 남의 일만 해주는 하청 회사로만 남기도 한다. 자신의 강점이 없는 회사는 협상에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을의 위치이고 장기적으로 생존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단기적인 생존이냐 장기적인 생존이냐의 줄다리기는 어느 쪽도 답일 수 없는 문제다. 당장의 생계를 무시하고 자체 솔루션 개발에 목을 메다가 자금난으로 망하는 수가 있고, 당장의 생계를 위해 솔루션 개발을 미루면 그 회사의 존속 이유가 흐려진다.

사람의 인생도 비슷하다. 스무살 전에는 부모가 자식의 생계를 책임진다. 육아는 20년의 초장기간 투자 행위다. 사람 하나를 회사 하나에 비유하자.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보자. 20년의 장기 투자를 받는 동안 확고한 수익모델을 만들어낸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냉혹하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투자자(=부모) 없이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자체 수익 모델이 없다면 더욱 난감하다. 대학원을 졸업했는데도 똑같다면 더더욱 난감하다. 위에서 간략히 설명한 두 가지 전략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남의 일을 위탁받아 처리해 주면서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는 것과, 결국에 자체 솔루션을 개발해 판매하려는 장기적인 비전과의 줄다리기다.


배움에도 유사한 모양새가 있다. 단기적인 처지를 위한 배움이냐, 장기적인 인생을 위한 배움이냐의 줄다리기다. 장기적인 공부는 당장에 쓸모를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20년 어치의 초기 투자를 받지만 우리 대부분은 아무래도 결과가 시원치 않다. 아쉽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다.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살 길을 모색해보자. 우리는 투자 받는 기간 중 제대로 된 결과를 적어도 한 번은 내놓았는데, 지금도 아무 부담없이 사용하는 한국어 스킬이 그 경우다. 한국어처럼 노력없이 구사하는 정도의 기술적인 도가 트려면 성과없이 버티는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단기적인 공부는 당장에 쓸모를 내놓을 수 있다. 시험 성적이든 졸업장이든 결과를 손에 쥐어 더 높은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명시적인 근거가 된다. 한편 졸업장이란 감가상각이 있는 소모품이라서 졸업후 3년정도 이후로는 거의 쓸모가 없다. 단기적으로 공부해 또 다른 졸업장으로 업데이트 하는 하청업체식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가치가 0으로 떨어지기 전에 자신만의 솔루션을 내놓아야 살아남는다. 한국어의 경우와 달리 이번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영어 스킬이 대표적이다. 10년 넘게 공부를 해도 외국인 앞에서 말한마디 하지 못한다. 자기 솔루션을 개발하는 공부보다 남이 주는 하청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그렇다. 회사가 당장의 일감을 떼어와 먹고살듯 우리는 당장의 숙제를 하고 시험을 본다. 시험을 본 후에는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음 일감을 물어온다. 다음에 물어오는 일감은 이전에 물어왔던 일감과 다른 맥락의 일이다.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말이다. 자기 제품이 없는 회사가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악순환이다. 단기적인 공부는 이미 사회에 만연한 방식이기 때문에 새롭게 할 말이 별로 없다. 장기적인 공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비유를 들어보자. 계곡에서 흐르는 물의 길을 바꾸려고 한다. 이 예시에도 단기적인 방법이 있고 장기적인 방법이 있다. 단기적인 방법은 물길을 손으로 틀어막는 것이다. 손도 시렵고 팔도 아프지만 당장에 물길이 바뀌는 효과를 낸다. 이 효과를 잘 누리고 손을 떼면 물길은 원래 있던 상태로 돌아간다. 졸업장은 따지만 결국에 배운게 없다. 


반면 장기적인 방법은 물길의 상류로 올라가 자갈을 옮기는 것이다. 물을 직접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손대는 것은 물이 아니라 자갈이다. 한두개 옮긴다고 티가 나지 않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결국에 물길이 바뀐다. 이번에 바뀐 물길은 영구적이다. 이게 중요하다. 장기적인 방법의 효과다. 우리가 어릴적 말문이 트인 이후 일생동안 아무 제약없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과 같다. 한편 장기적인 방법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 효과가 드러나기까지 시간이 지나치게 소요되기 때문에 현실에 비추어 무용할 수 있다. 단 5분의 제한시간 안에서 효과를 내야 한다면 자갈을 옮기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때는 손으로 막는게 현명한 방법이다. 본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장기와 단기의 적절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것과 저것의 균형을 맞추자면 이것도 잘 알고 저것도 잘 알아야 때에 따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적인 공부는 이미 잘 알지만 장기적인 공부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아직 우리에게 명확하지 않다. 문제집 풀고 시험보는 공부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공부만 해 왔다. 눈을 감고 하는 공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당장의 결과에 대해 눈을 감는다는 말이다.


학생이라면 많은 양의 학습지를 대충 풀어 치우기보다 사소한 개념 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고 꼼꼼하게 엮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그런 세월이 쌓여 제대로 성장하고 실제로 유능함이 발현된다. 앞으로 나가는데 힘쓰기를 내려놓고 거꾸로 밀어넣다 보니 역으로 밀리는 힘에 의해 자연히 앞으로 나가는 식이다. 문제 (problem)는 억지로 푸는 게 아니라 자연히 풀리도록 한다. 힘을 들여 태엽을 감아두면 스스로 풀리는 모양새다. 장기적인 방법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태엽을 감는 데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애초에 감기지도 않은 태엽을 힘으로 풀겠다며 애를 쓴다. 

“발사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나에게 충고했다.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당기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눈이 쌓이면 대나무 잎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이지요. 그러다가 일순간 잎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데도 눈이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이와 같이 발사가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최대로 활을 당긴 상태에 머물러 있으세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최대로 활이 당겨지면, 저절로 화살이 나갑니다. 발사는 사수가 의도하기도 전에, 마치 대나무 잎에 쌓인 눈처럼 사수를 떠나가야 합니다.” -마음을 쏘다, 활. 오이겐 헤리겔

장기적인 공부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물길과 태엽의 비유를 들었다. 아직 와닿지 않는 독자가 있으리라 보고, 다른 설명을 추가해본다. 

내가 자갈을 만지면 물길은 바뀌게 된다.
내가 태엽을 감으면 태엽은 풀리게 된다.
나의 의지로 하지 않았다. 
그것이 스스로 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종종 하는 말 중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자신의 의지로 상황을 통제하기보다 신이 인간을 사용하는 바에 자신은 그저 순종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오용 사례가 많기는 하지만, 이 문장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논의를 떠나서도 중요하다. 성경을 자기 편의대로 오용하지만 않으면 거기서 매우 깊은 지혜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친구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들면 잘 되지 않는다. 길가던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나는 너랑 친구하고 싶어' 라고 말해보자. 친구가 되는가 안 되는가. 친구는 되는 것이다. 내가 하겠다고 덤벼서 하는게 아니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사람대 사람의 관계도 그렇고, 신과 사람의 관계도 그러하며, 사람과 물건의 관계도 그러하다. 관계는 하는게 아니라 되는 것이다. 나의 의지를 투사하여 일을 성취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교회에서 오용하는 순종이라는 단어의 의미다. 상급자의 의지를 내가 그대로 따르는게 순종이 아니다. 이미 되어있는 바, 자연히 그러한 바를 그 누구의 의지도 관철하지 않은채 나 역시 자연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순종의 적확한 예는 스노우보드에서 찾을 수 있다. 눈 산에서 스노우보드를 탄다고 하자. 사람은 몸을 기울여 균형을 잡는다. 전진을 가능케 하는건 중력이다. 나의 의지가 아니다. 이미 그 자리에 있는 눈길에 자연히 몸이 가도록 순종하는게 유능한 스노우보더다. 


공부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 이제까지의 논의가 수학문제 영어문제를 푸는데 어떤 관점을 제공하는가 알아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수학은 문제풀이가 아니고 영어도 문제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태엽의 비유를 다시 들자면 문제는 푸는게 아니라 풀리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을 푸는 일이 아니라 감는 일이다. 


그래서 장기적인 공부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답답해하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1번 2번 3번으로 메뉴얼을 주면 시도라도 해 보겠는데 다른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법이 메뉴얼 따라서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메뉴얼은 유용하지만 모든 상황에 유용하지는 않다. 


도움을 위해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한다. 물길의 상류쪽 방향과 하류쪽 방향이 있다. 눈에 보이는 수학 공식이나 영어 문장, 그리고 나 자신은 이미 결과로써 존재한다. 문제와 나는 하류에 서 있다. 당장에 문제를 풀겠다는 식이면 당장의 물길을 손으로 막는 격이다. 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의 학습지 문제집이 눈에 보이므로 그것을 공부의 시작이라고 본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 수학 문제는 공부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눈에 보이는건 물길의 하류라는 말이다. 문제를 앞에 두고서, 그것이 하류이도록 만드는 상류의 모양을 추정해보라. 태엽을 감는 공부다.

문제를 풀고 있을 때 ‘걱정하지 마라’.
자 문제를 풀어낸 ‘이후’ 그때가 바로 ‘걱정을 시작할 때’이다. 
When you are solving a problem, ‘don't worry’.
Now, ‘after’ you have solved the problem, then ‘that's the time to worry’.

조금 쉬운 예를 들어보자. 친구와 다퉜다는 사실이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싸우고 나니 기분이 안좋군", "우리가 왜 싸우게 되었을까".  전자는 물길의 하류를 향하고, 후자는 물길의 상류를 향한다. 


물길의 하류는 분리됨을 향한다. 이미 다 끝난 일의 이후를 생각하기 때문에 간격이 더욱 벌어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반면 물길의 상류는 하나됨을 향한다. 이미 다 끝난 일로부터 이 일이 있게 된 원인을 묻다가 결국에 갈라짐 자체를 조절하는 힘을 얻는다. 유창성 (fluency)을 획득한다. 상류를 향하는 공부를 터득하면 해당 분야의 유창성을 그 증거로 얻는다. 영어공부를 할 때 단어의 어원을 찾으라는 말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장기적인 공부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방향이 아니라 융합하는 방향이다.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는 그것의 기원, 눈에 보이지 않는 시작을 묻는 것이다. 상류의 어느 돌을 어떻게 움직이면 하류의 바로 그 물길이 갈라져 나오는가를 유추해보자. 분열됨이 아니라 하나됨을 향하는 공부가 장기적인 공부다. 가만 놓아도 흘러가는 물길을 더 흐르게 하겠다고 노력하지 말자. 장기적인 공부다.

‘나’에게 돌파구를 제공한 개념은 질(質). ‘가치’로 이해해도 좋고 궁극적으로는 주객(主客)의 분별을 지우는 불교적 선(禪)과 통하는 이 개념을 통해 주인공은 정신과 물질, 본질과 현상을 양 축으로 하는 뿌리깊은 이분법적 사유를 한데 결합할 방도를 찾는다. “질(낭만적 질)과 그 질의 현시(고전적 질)는 본래 하나이고, 이것이 품위를 갖추고 그 모습을 드러내면 서로 다른 이름(주체와 객체)이 주어지나니.”(447~448쪽) 주인공은 이를 다른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인간적 가치와 기술 공학적 요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기술 공학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 공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 이원적 사유라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있다.”(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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