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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08. 2019

소망

소망이 욕심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나는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알고 싶다. How people learn. 꿈이라고 해도 좋고 소명이라고 해도 좋고 비전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알고 싶다. 13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직 아니지만 나중에 성취할 일을 지금 소망하는게 아니다. 나는 당장 오늘 이 순간에도 저 문장을 내 삶에서 소망하고 실천하는 중이다. 꿈이란 나에게 그런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 오늘은 이렇게 살지만 언젠가 다를거야 하는 건 그저 욕심이다. 욕심은 나를 중심으로 하지만 소망은 나만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소망이 욕심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지금 당장에 그러할 것. 어려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자. 좋은 소망이다. 그 말이 허황되지 않으려면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오징어 배를 갈라서 내장을 들여다본다든지 하는 그런 작은 버전의 같은 일을 꾸준히 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자기 말이 지켜진다. 자기 말에 대한 의무이며, 소망하는 바에 순종하는 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해 의대에 가는 건 원래 매번 하던 일의 발달된 형태이지, 어느날 입학식부터 밑도끝도 없이 척 하고 장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삶과 일이 분리되면 자기 이야기가 직업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일과 취미를 분리해 살게 될 확률이 높다. 삶과 업이 분리되어 일하면 괴롭고, 취미는 돈이 안 된다. 막연하게 좋은 미래를 그리는 경우도 그렇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든지 사람들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든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든지. 꿈꾸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 당신이 꾸는 그 미래의 작은 버전을 바로 지금 실천하고 있는가. 어느날 번쩍 하고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건 아닌가. 


둘째로 아픔을 함유할 것. 꿈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면 결국에 그것으로 가치를 만들어 팔아야 한다. 직업이면 돈이 되어야 하니까. 남에게 팔고자 하면 그것을 구매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어쩌면 좋겠다는 생각은 남에게 공감되지 않고, 공감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직업을 소망과 일치시키는데는 아픔이 필요하다.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연대가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나의 아픔은 곧 남의 아픔인 경우가 많고
나의 소망은 곧 남의 소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고통은 실재다. 과거 혹은 현재형이다. 삶은 근원적으로 고통이다.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중인 일이다. 나에게 실현된 일이면 70억 인구중 같은 고통을 짊어진 사람에게도 일어남직한 일이다. 고통은 현실에만 있고, 매우 구체적이며, 실제로 나 아닌 누군가에게도 벌어진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내 고통을 짊어지고 또 해소한다면 같은 고통중인 남과 연대할 수 있다. 큰돈이 되든 적은돈이 되든, 남에게 전달해 유용하게 쓰인다는 말이다. 반면, 아픔이 없는 그저 바람은 미래형이다. 나에게 실현된 적이 없다. 나에게 실현된 적이 없으면 남에게도 낮은 가능성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사람은 고통과 그 해결책은 공유하기 쉽지만 이상과 그 성취는 공유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와 남의 교집합은 아픔이나 고통에서 찾아야 높은 가능성으로 찾아진다. 그래야 전달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판매할 수 있고, 그러면 지속 가능한 나의 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스타트업을 경영하면서 사용자의 paint point를 해소하는데 초점을 두는 이유가 이것이다. 고통이 배제된 소망은 남이 공감하기 어렵다.

예컨대 내가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알고 싶은 이유는 바로 내가 그것을 몰라 반평생을 고통의 세월로 보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때 나는 수학을 잘 하지 못했다. 수학을 잘 하는 법을 알고 싶었지만 쉽게 알아지지 않았다. 하면 할 수록 더 못하겠어서,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알아야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사람이 임의의 분야를 자연스럽게, 효과적으로 배우는 방법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한국말은 아무 고통이 없이 재미있게 배워서 전문적으로 구사하는데, 왜 다른 기술은 그렇지 못하나. 남들은 쉽게 하는데 왜 나만 억울하게 당해야 하나. 고민하고 공부하고 탐색했다. 지난 13년의 세월 단 하루도 빠짐이 없이 나는 그것만을 생각했다. 정신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든 생각은 할 수 있다. 내가 잘못된 공부방법을 주입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 놓아두면 오히려 나았을 학생을 괜히 휘저어 길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 학교 시스템임을 알았다. 앎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내가 고통을 겪으며 이런저런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알았더라면 그 고통을 전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후회가 가득하다.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젊고 자유로울 때 나를 더 성장시켰을 수 있다. 그러지 못해 내가 스스로 분하고 억울하다. 앞으로 내 인생은 잘 살아가겠지만, 내가 지금 뻔히 아는 쉬운 것을 남은 단지 모른다는 이유로 같은 고통을 겪으며 젊음을 보내지 않으면 좋겠다. 나는 나를 구제한 그 방식으로 남도 도울 수 있다. 남을 도운 대가는 기본적으로 무료겠지만 운이 좋다면 돈도 벌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배우는가. 이 질문은 남과 높은 확률로 공유할 수 있는 paint point를 함유하고, 어제도 오늘도 나에게 실재하여 실현중이다. 삶은 매 순간이 고통의 무게를 짊어지는 일이다. 자기 십자가에 매일 순종할수록 하늘 위 소망을 땅에서 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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