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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r 08. 2019

원하는 일, 자라는 일

성장하는 두 가지 방식

사람들은 진로고민을 한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렇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는다. 


우리는 좋은 집을 원하거나 좋은 차를 원할 때 원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장난감이 손에 없지만, 나중에는 장난감이 손에 있기를 원하듯, 기대하는 바로 그것을 얻겠다는 의미다. 단어의 뜻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지금 상태(=현재)는 그렇지 않으나 나중 상태(=미래)에는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시장에 뭔가를 제공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소비자의 반대 개념은 생산자다. 뭔가를 만들어 시장에 제공하는 사람이다. 소비자가 받는 입장이면 생산자는 주는 입장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받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지 않나? 소비자가 일방적으로 받는 입장은 아니다. 그렇다. 그러나 돈은 재화를 주고받는 교환활동을 위한 도구이지 재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 재화가 있기 때문에 돈이 의미가 있다. 돈 없이도 재화는 교환할 수 있지만, 재화 없는 세상에서 돈은 무의미하다. 


진로는 결국에 생계와 무관할 수 없으므로, 진로를 고민한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표현이다. 밥과 옷을 구입하면서 소비자이지만 또 어느 면으로는 생산자여야만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다. 오늘 먹고 입느라 소비한 것은 많은데 그러면 나는 무엇을 생산했나?


우리는 어릴 적부터 TV만화를 소비하고, 장난감이며 학용품을 소비하면서 길러졌다. 때문에 원하는 일을 찾고 싶다는 표현에는 여전히 소비자로서의 시각이 담겨있다. 그것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져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 자식이 20년 후 무엇이 되기를 원할까? 아기가 생긴 그것으로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을까. 자식이 커서 무엇이 될지를 아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부모의 기대하는바 그대로 키운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행복일까? 생산자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농부여도 좋고 제빵사여도 좋다. 그 사람들은 비싸게 팔릴 쌀과 빵을 원해서 만들어낸 것일까?


소나무가 이러면서 아득바득 자란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천 년을 사는 거목이 될 테야.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야

이 태도가 소나무의 천성에 어울리는 것일까?


사람은 생물이고 생물은 자란다. 자람은 미지를 향한 연속적인 활동이며 생명 있는 것의 본성이다. 여기에 줄기를 정확히 어느 방향으로 뻗고 싶어서 뻗어나가는 나무는 없다. 오른쪽 줄기가 이리로 뻗을지 저리로 뻗을지는 실제로 뻗어보기 전에는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무는 좋은 방법을 찾아낸다. 시간을 따라 잔털을 자주 뻗는다. 그러면 대부분은 잔털로 남고, 그중 몇몇은 줄기가 된다. 그 중 또 몇몇은 굵은 가지를 이룬다. 자라나는 방식이다. 시도하고 자라나고 시도하고 자라남의 반복이다.

시도-자란다-시도-자란다-시도-자란다-시도-자란다-시도-자란다-시도-자란다-시도-자란다

얼마나 시도할지, 또 얼마나 자라날지는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반면 원하여 획득하는 쪽을 보자. 그림의 왼쪽에 묘사되어 있다. 이 과정의 반복이다. 

원한다-획득-원한다-획득-원한다-획득-원한다-획득-원한다-획득-원한다-획득-원한다-획득

소비자는 구매하기 전에 정확히 그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라는 판단으로 지갑을 연다. 소비활동은 불연속적이고, 또 예측이 가능하다. 불연속적이라는 말은 여러 차례의 구매 활동에 맥락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원하면 이것을 구입하고, 저것을 원하면 저것을 구입한다. 이것과 저것의 연관은 단지 내가 그때 그것을 원했다는 점 뿐이다. 


생산자를 보자. 실제로 자라나기 전에는 그 값어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생산활동은 연속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연속적이라는 말은, 여러 차례의 생산 활동에 맥락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 잔털은 다음 잔털과 무늬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자랐다가 또 저렇게 자란다. 이것과 저것이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그 맥락이 눈에 띄게 자라면 곧 자신의 캐릭터나 정체성, 브랜드가 된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말은, 그래서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잔털이 없는 민둥나무다.

소비는 크고 많고 비싸고 불연속적일수록 좋다.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모형이다.
생산은 작고 적고 저렴하고 연속적일수록 좋다.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모형이다.

소비하는 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산은 작게, 적게, 저렴하게, 그리고 연속적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면 자란다.


아티스트로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형편없는 아티스트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자신이 초보자임을 인정하고 기꺼이 형편없는 아티스트가 됨으로써 진정한 아티스트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훌륭한 아티스트가 될 것이다. 강의를 하면서 이 점을 지적할 때면 자신을 방어하는 적대감에 부닥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피아노를 잘 치게 될 때쯤에는(또는 연기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멋진 소설을 쓸 때쯤에는) 제가 몇 살이 되는지 아세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나이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제 시작해보자.
- 아티스트웨이/줄리아 카메론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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