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함에 대처하는 수단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종교 (宗敎)란 머리가 되는,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자기 삶에서 어떤 가르침을 으뜸으로 두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래서 어떤 가르침이든 종교가 될 수 있다. 어떤 가르침을 다른 가르침의 앞에 두기만 하면 된다. 종교란, 내 앞에 놓인 불확실함을 어떤 가르침을 동원하여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다.
아래 그림의 중앙에는 혼돈의 카오스가 그려져 있다. 불확실성은 사람에서 올 수도 있고, 미래에서 올 수도 있고, 어떤 사건에서 올 수도 있다. 정보 없음이 곧 불확실함이다. 내가 모르는 영역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전부 다 아는 경우란 없다. 바로 이 불확실함에 대처하기 위해 사람은 가르침을 자기 앞에 둔다. 앎, 지식, 종교는 그래서 같은 말이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자기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무지 (無知)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무지에 대하여, 아래 그림의 왼쪽 사람은 두터운 벽을 만들어 대처한다. 가르침의 벽, 앎의 벽, 지식의 벽이다. 남들의 가르침, 스스로 만든 가르침, 전해내려오는 가르침, 그 모든 선행지식이 불확실함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데 사용된다. 아는 것은 힘이요 방패다. 불확실함을 덮는 확실한 덮개다. 지 (知)로 무지 (無知)를 덮는 것이며, 앎으로 모름을 덮는 것이다. 이러면 나는 안전하지만 대신에 배움이 없다.
아래 그림의 오른쪽 사람은 무지에 자기 몸을 그대로 밀어넣는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멋모르는 어린아이와 같다. 불확실함에 몸을 맡긴 결과로 다치거나 망신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실제로 다칠 수가 있다. 위험하다. 대신에 여기에서 배움이 온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부모는 자식을 믿고, 자식도 부모를 믿는다. 부부도 서로를 믿는다. 이 믿는다는 것은 상대가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내가 알지 못해도, 그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으로 본다는 식이다. 상황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서 예상치 못한 데로 흐를 수 있다. 불확실하지만, 그 불확실함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마저 포함하여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신뢰 (trust)다. 상대를 신뢰하기 때문에 무지 앞에서도 마음을 놓는다.
의처증이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상대가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시시콜콜 참견하며 계속 함께 있거나 적어도 연락이 항시 가능해야 한다. 모든 불확실함을 확실함으로 뒤덮어야 마음을 놓는다. 정보가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상대를 믿지 못한다. 불신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보를 획득하여 확실한 상태를 만들어두려 애쓴다. 이처럼 상대를 믿지 못할 때에 두꺼운 지식의 상태를 만들어 불안을 해소하는데, 흔히 말하는 종교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가르침, 곧 종교에서, 극단적인 주장 (완벽한, 반드시, 절대로)이 있는지를 보면 그 종교가 광신으로 향하는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다. 광신에는 극단적으로 배움이 없다. 눈앞에 완벽한 믿음의 철벽을 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때로는 반석에 비유하기도 한다. 단단한 믿음 앞에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런데 의심이 없다는 말은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래서 배움이 없다는 말이다. 아래 예문을 보자.
자녀가 엄마에게 질문을 한다. 엄마 하늘이 왜 파랗지?
엄마가 자녀에게 질문을 한다. 너 숙제 했어 안했어?
둘 다 질문이다. 그런데 다른 질문이다. 전자는 상대를 신뢰하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고, 후자는 상대를 불신하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질문에는 종류가 있다. 믿기 때문에 하는 질문과 못 믿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 있다. 전자에게는 배움이 있고, 후자에게는 배움이 없다. 전자는 자유롭고, 후자는 종교적이다. 전자는 모름을 먼저 받아들이고 따라서 알게 되지만, 후자는 앎을 수집해 모름을 덮으려 한다.
사람은 연약하므로 종교를 따르는 것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으나, 그 믿음이 단단할수록 문제가 두드러진다. 반석같은 믿음 이라는 개념이다. 쉽게 오용된다. 일점 의혹 없는 확실함을 곧 단단한 믿음이요 추구함직한 덕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칠 때 맹신 (盲信)을 거쳐 광신 (狂信)이 된다. 확신에 찬 주장은 환상이다.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이란 없는데도 앎을 맹신하므로 모름을 인식하는데 큰 왜곡이 온다.
단단함이란 내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함에 나를 밀어넣고서 살아갈 때를 뜻하는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불확실함에 자기를 내던져 살아갈 때를 단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모르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 비도 맞고 눈도 맞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반석같다고 하는 것이지, 비가 올지 눈이 올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통제하려는 발버둥을 반석같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단한 믿음이란 모름을 앎으로 뒤덮어 놓는게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 그대로에 자기 몸을 밀어넣는 마음의 단단함을 일컫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다 알지 못한다는 무지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상대를 믿고 (trust), 신뢰한다. 내가 단단하지 않고, 너도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무지하므로 언제든 다칠 수 있다. 그럼에도 괜찮다. 다칠 수 있다 라고 받아들일 때, 그럴 때 앎이 온다. 세월히 흘러도 여전히 모르는 것은 투성이지만 그 모름에 자꾸만 나를 내던지니 나는 갈수록 단단해진다. 그 과정을 믿음 (belief)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