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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un 30. 2021

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멘탈잡기_3-1]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문제적 인물을 받아들이는 것

직장생활 중에 정말이지 너무나도 싫은 사람이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사람 성질을 긁어놓는 그 이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매일매일이 고역이었다. 사람 좋은 것처럼 굴다가도 세상 매섭게 짜증을 부리는 그 사람을 보면서 어쩜 저럴 수가 있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출근길 전철에서 내릴 때마다 나는 '그 이가 오늘 당장 어떤 이유든 이 직장을 때려치우게 해 주소서' 하고 빌었다. 16살 이후로 원하는 건 뭐든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고 역시나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이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먼저 그만두고야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딜 가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게 문제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던 것 같고, 심한 경우는 무리 전체가 그러하기도 했다. 사람이 다섯이면 그중에 하나는...이라고 하던데 그런가 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적 그 한 명들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라는 실존적 부분이었다.  정말로 명백한 사이코패스라면 도망치는 것이 답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봐야만 하고, 다 버리고 도망칠 만큼의 대단한 위인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내 생활을 망쳐놓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말이다.


죽도록 미워도 해보고 내 생활 반경에서 몰아내려고 궁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적 인물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이대로 가다간 일생을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내게 될지도 모르며, 내 묘비명에는 '열여섯 살 때 ㅇㅇㅇ씨, 스무 살 때 ㅁㅁㅁ씨, 스물 다섯 때 ㄱㄱㄱ씨, 서른두 살 때 ㅈㅈㅈ씨...(중략)... 모두 증오하며 망하길 바라며 삶' 이렇게 적힐 것이다. 이건 너무 부끄러워서 안 되겠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문제적 인물일 수 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다만 이것만 의식하면서 부정하고 싶어서 한동안 많은 실수를 거쳐왔다. 내가 그들을 보듯이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주 끔찍해서, 문제적 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수시로 자기 검열을 해댔다. 누군가 기분이 상했다고 하면 내가 문제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눈치를 살폈고, 무리에서 나 외에 다른 사람들끼리 더 친한 것 같으면 이미 문제적 인물로 찍힌 건 아닐까 싶어 더 밝은 척 잘하려고 오버했다. 문제적 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남의 눈치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에 너무 얽매여버리곤 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문제적 인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상대가 나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가능의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짓을 당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다. 


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할 때 조용히 식사에 집중하는 것이 예의이며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나게 흥을 내며 식사를 해야 사람이 모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같은 식사 모임에서도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누군가는 삭막하다고, 누군가는 지금의 때와 장소는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조용히 식사하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한다면 내 앞에서 분위기를 돋우려 열심히 떠드는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인가?

아니다.

그 사람은 잘못된 것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의 문제적 방식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나는 나의 방식대로 내 삶을 살아가는 중이며 그는 그 의 방식대로 그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의 상식과 삶의 방향이 적당히 재미있거나 흥미롭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테고,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은 좋다.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즐겁기도 하고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방식이 껄끄럽고 불편하기만 하다면, 그냥 그의 삶을 살게 두면 된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고쳐주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리할 수도 없다. 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는 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사회생활을 둥글게 잘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인식이야 사회과목 100점을 받을때부터 알고있었다. 다만 그 다름들이 서로 얽혀 들어가 얼마나 큰 차이와 이해불가능의 영역을 만들어내는지 나는 몰랐다. 이 글 시작 부분에서 언급한 그 이는 일하는 스타일도 의견을 나누는 방식도 나와 너무나 달랐고 자라온 환경도 식성도, 결정적으로 유머감각도 나와는 천치 차이였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이었으니, 세세한 모든 부분에서 그 이와 나는 그 이의 언행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때로는 왜곡해서 이해해버렸으며, 때로는 몹시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이직 후에야 비로소 나 역시 그이에게 문제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그이 나름의 예의와 배려는 늘 있었다는 것도. 여전히 나는 그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름의 예의와 배려였다는 것도 신선하게 의아하긴 하다. 그래도 그이도 이 험한 세상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잘 살아주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눈치는 더럽게 살피면서도 늘 제멋대로인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이해하려 애써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임을 이제는 안다.  전혀 이해가 안 되고 불편하지만 인간적인 배려를 다 했던 성숙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도 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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