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맨션아파트에는 또래 아이들이 많아서 늘 같이 놀았다. 어느 날은 동갑인 남자애가 플라스틱 새총을 구해와서 자랑을 했다.
우리는 새총이면 응당 새도 맞힐 수 있어야 한다며 새를 잡자고 부추겼다. 그러면서도 다들 속으로는 당연히 잽싼 새를 맞출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새총도 별 것 아님'의 결론을 얻어서 자랑질을 무색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야 김샌 새총 주인이 우리에게도 한 번씩 새총을 가지고 놀게 해 줄 테니까. 혹시 운 좋게 날개라도 스쳐 새를 잡을 수 있다면 잡은 사람이 키울지 다 같이 키울지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다들 새로운 장난감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쏜 새총에 맞은 참새 한 마리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가까이 가서 본 참새는 머리가 깨져 끔찍한 모습이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다 결국 숨이 멎은 참새를 몇 살 많아 벌써 학교도 다니고 있던 동네 오빠가 나서서 화단에 묻어주었다. 직접 쏜 새총 주인은 얼어붙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중에 새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는 없었다.
그 이후로 참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작은 장난질에 너무 쉽게 죽을 수 있는 참새는 어린 나에게 죽음의 이미지와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유도한 데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이 몹시 무거웠다. 모든 것이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웠다. 참새만이 아니라 모든 작은 동물들이 무서웠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골목마다 있던 쌀가게들이 사라지고 참새도 보기 힘들어졌다. 나이가 들었고 두려움도 점차 사라졌다. 무서워했던 것의 정체가 참새 자체가 아닌 내가 끼칠지도 모를 해약이었다는 걸 구분할 수도 있었다. 끔찍한 이미지가 기억에서 흐릿해진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몇 해 전 강남역에서 참새가 내 눈앞에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주워다 화단 풀숲에 옮겨두고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면서 알았다. 정말로 무서웠던 건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걸.
감정의 정체를 확실히 아는 것, 기억의 망각을 기다리는 것,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산책길에 덤불에서 새소리가 나면 유심히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본다. 분주하게 폴짝거리는 작은 새들이 귀여울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본다. 주인공이 참새라면 반갑다. 흔한 참새라지만 흔하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