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용으로 받아두었던 약을 꺼내 먹었다. 정신과 약이라고 하면 어쩐지 무시무시한 기분도 들고 함부로 먹으면 위험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필요할 땐 먹어야 한다. 마지막 병원 방문에서 언젠가 문득 불안 수준이 높아지거나 공황이 오려는 느낌이 들면 먹으라고 미리 복약 지침을 받아둔 비상약을 한 알씩만 먹었다. 며칠 지나도 좋아지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병원에 와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사흘 만에 좋아졌으므로 병원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약을 남용하거나 과하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너무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 과도한 불안과 각성상태, 공황의 반복 등은 결국 신경물질들의 전달체계의 문제이므로, 생각을 바꾸거나 마음과 행동을 고쳐먹거나 하는 것만으로 좋아지지 않는 경우가 있고, 이때가 반드시 약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에게 약이 필요한 순간이 언제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스스로 좋아질 의욕조차 없을 때이다.
약 자체보다는 병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지만, 이제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 상황이다. 상태가 너무 나쁜 나머지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힘들기만 하다 보니 스스로 나아지고 건강해질 의욕조차 없어질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까지 의심되던 시기였는데, 이런 상황에 혼자 극복한다는 건 처음부터 모순이다. 좋아질 의욕이 없는데 혼자 극복할 리가 없다. '병원이 무서우면 보건소 정신건강복지센터라도 가보자'라고 격려해 준 남편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병원 문턱도 넘지 않고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병원에 간다고 없던 의욕이 갑자기 샘솟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찾아주거나 어떻게든 몸이 쉴 수 있게 약을 처방해주거나해서 의욕을 되찾을 최소한의 여력을 만들어준다.
두 번째는 생각을 아무리 바꾸려고 애써도 되지 않을 때이다.
불안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내 경우에는 이미 머리로는 별로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몸이 반응해올 뿐. 이상하지 않은가? 머리로는 이미 그다지 대단한 상황이 아닌 걸 알고 있는데도 몸의 호흡은 가빠지다 못해 멈추려고 하고 팔다리가 굳고 기절할 것 같다니?
그러니까 병인 거다. 장기적으로는 습관을 바꾸고 평상시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고쳐간다고 하더라도, 상태가 심각할 때 단기적으로는 약을 먹어주는 편이 좋다. 약으로 한 번쯤 불안의 패턴을 바꿔주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도 꽤 힘든 일이 된다.
마지막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이 심할 때이다.
이번에 약을 꺼내먹은 이유다. 모든 수단을 다 써도 불안 수준이 높은 상태가 계속되면 온 몸이 과하게 긴장하곤 하는데,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몸 구석구석이 몹시 아파온다. 검사해보면 다른 질병은 없는데도 말이다. 마치 꾀병같기만 하지만 그 통증은 의외로 심해지기도 하다. 일단 몸이 아파오면 아프기 때문에 신경세포들은 더 불안해하는 것 같다. 그러면 더 긴장하고, 몸은 더 아파온다. 악순환을 한 번 끊어줘야 한다.
끊었던 약을 다시 꺼내먹을 때마다 좌절하곤 했다. 결국 완치되지 않는 걸까, 평생 약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약을 끊는 과정에 여러 번 다시 약을 먹게 되곤 하면서 담당의사에게 이런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때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 감기약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때요?
감기에 걸리면 어떤 사람은 꿀물 한 잔 마시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금세 회복하지만 어떤 사람은 약을 꼭 먹고 주사를 맞고 심하면 입원도 해야 한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매번 약을 먹는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살면서 자주 감기약을 먹어줘야 하기도 한다.
내 몸도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그냥 감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볍게 지나가는 날도 있지만 약이 필요한 날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