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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ul 07. 2021

내 마음도 모르고...

[멘탈잡기_4] 사람에 대한 기대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는 꽤 수다스러운 편이다. 끊임없이 머릿속에 바글바글 대는 예민한 감정들을 어떻게든 말로 풀어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왜 알려지지 않았냐면, 수다를 풀어놓을만한 친구가 많지 않아서다. 내 속에 있는 말랑하고 살짝 어두운 부분들을 가십거리 떠들듯 풀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 수다의 대상은 언제나 소수정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신뢰는 높았고 기대는 잡초처럼 자라났다. 내 생각과 감정들을 모두 말하고 표현하면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공감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외롭지 않겠지. 어쩌면 저들도 나에게 감정들을 다 털어놓고 더 깊은 관계가 될 거야...


언제나 문제는 외로움이다.


하지만 공감해주고 속내를 보여준 사람들도 만남이 잦아지고 더 많은 감정들을 표현하고 나면 오히려 서서히 멀어지곤 했다. 서운했고 배신감이 들었고 외로웠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 사람은 진짜 내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 다시 진짜 내 사람을 찾으려고 했다.


언젠가 내 소수정예 수다 상대에 포함되어 있던 한 친구는 "레기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것 같아"라고 말했는데,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당연히 부정했다. 그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10년쯤 되는데, 지금은 인정할 수 있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다.


내 감정들을 누군가 완전히 이해할 거라는 기대

내 감정들을 누군가 온전히 공감할 거라는 기대

내 감정들에 누군가 완벽히 대응하여 감정을 보여줄 거라는 기대

그리고 그 누군가의 감정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가장 무서운 것은

내 감정들에 따른 인과관계로 나온 행동, 선택들에 대해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으려는 기대까지 했다.


욕심쟁이였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내 감정을 다 이해하진 못하니까.

'없는 돈을 쪼개서 시킨 음식이 너무 맛이 없어서 슬펐어'라고 설명해봐야, 그 슬픔이 기분이 가라앉는 정도인지 인생이 비참해질 정도인지는 모르고, 어느 정도인지 설명해봤자 상대도 똑같이 슬픈 감정을 갖지는 않는다. 아주 친절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슬펐던 경험에 비추어가며 이해하고 공감해준들, 비슷해 보였던 각자의 슬픔은 더 알아보면 많이 다를 것이다. '너무 슬퍼서 음식들을 집어던졌어'라고 한들, '음식을 집어던지다니 아주 잘했군' 할 사람은 없다는 거다. 미쳐버릴 정도로 많이 슬펐나 보다 이해해주면 고마울 일이다.

 

감정은 지극히 내면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동시에 가질 수 없다. 혼자서 풀어내야 한다. 누군가가 내 감정을 풀어낼 계기를 줄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해소하고 풀어내는 것은 혼자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외롭다.


각자가 자신만의 감정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중에 내 감정들을 늘어놓고 챙겨봐 달라고 징징거렸으니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다정한 마음으로 조금 같이 살펴봐주려고 했더니 더 봐달라 떼를 쓰니 얼마나 곤란했을까. 지나간 사람들의 마음들에 고맙고 미안하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감정이 흔들리는 진폭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요즘은 밖에 끄집어내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감정들은 자주 오지도 않거니와, 온다 한들 별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어설프게 말로 설명하느라 애매한 단어들로 감정을 오염시키고 싶지도 않다. 말로 옮기다 보면 진짜 감정과는 다른 정형화된 감정이나 아니면 특별해 보이는 이상한 다른 것이 되어있곤 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냥 둔다. 감정이 일었다 사그라드는 그대로 느끼며 그냥 둔다. 혹여나 밖으로 삐져나와 증식하지 않도록 가만히 지켜본다.


좋은 감정 내비치는 것까지 꺼리진 않는다. 나랑 똑같이 기뻐해 줘, 나처럼 즐거워해 줘, 이런 아기 같은 마음은 아니고, 기분 좋은 사람 근처에서는 같이 있는 사람도 조금은 가벼워지곤 하니까 나쁠 것 없겠다 싶은 정도로 가볍게 내비친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내 속에 묻어두려고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밖으로 드러나면 보는 사람도 어떤 식으로든 기분이 나빠지니까. 밖으로 표현한다고 화나 짜증,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표현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설명이 필요할 때는 감정을 꺼내 말한다. 감정적으로 행동했을 때 내가 이상한 짓을 한 건 기분이 이래서였으니 이해해달라고 한다.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내 입장에서 기분 나쁘다, 화가 난다고 설명한다. 간단하지만 감정 상황을 전달했으니 나머지는 상대방의 몫이다. 나를 배려해서 받아주면 감사한 일, 상관없이 마음대로 하면 그냥 남이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남이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그도 그의 감정이 있기 때문. 그래서 더욱,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할 줄 알고 먼저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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