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 1 - 말이 현실을 바꿀 때

‘죽겠다’의 자동반응에서 ‘함께 걷겠다’의 신앙으로

by 강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잠언 18:21)


“아, 죽겠다.”

이 말은 내 몸이 보내는 구조 신호처럼 튀어나온다.

정작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진짜 벼랑 끝에서는 말조차도 굳는다.

그러니 이 말은 대개 ‘나는 지금 많이 버겁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말이 습관이 되면, 언어가 현실을 덮어쓴다는 데 있다.

같은 하루도 ‘죽겠는 하루’라는 필터를 씌우면, 평범한 굴곡마저 재난으로 보인다.


해가 쨍쨍한 날엔 우산 장사를,

비가 퍼붓는 날엔 짚신 장사를 걱정하던 그 오래된 이야기처럼,

해석이 행복을 가두기도, 풀어 주기도 한다.

시선을 반대로 돌리기만 해도 장면이 바뀐다.

해가 나면 짚신이 팔리고, 비가 오면 우산이 팔린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표정이 달라진다.

이 작은 전환이 자기 결정의 첫 움직임이다.


심리학은 이 전환의 메커니즘을 오래전부터 설명해 왔다.

에런 벡(Aron Beck)의 인지행동치료(CBT)는 우리가 고통을 크게 느끼는 순간,

마음속에서 인지적 왜곡이 자동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한 번의 실수를 “나는 원래 안 되는 사람”으로 확대하는 과잉일반화,

세상을 성공과 실패로만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이미 파국처럼 상상하는 파국화가 그렇다.

이때 해야 할 일은 감정을 지우는 게 아니라, 해석을 잠깐 멈추어 세우는 일이다.


“정확히 무엇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내가 들이민 증거는 무엇이고, 반대 증거는 무엇일까?"

"덜 비극적으로 읽을 가능성은 없을까?"

불쑥 튀어나온 자동적 사고를 종이에 적고, 같은 장면을 한 줄만 다르게 말해 본다.

제임스 그로스(James J. Gross)가 말한 ‘인지 재평가’는 그렇게 시작된다.

같은 상황이라도 다른 의미를 붙이면, 감정의 곡선이 달라진다.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의 합리정서행동치료(REBT)는 또 다른 시비를 가린다.

“꼭 그래야 한다”는 당위의 언어,

스스로에게 가혹한 ‘해야만 한다’의 채찍질이 좌절을 키운다는 것이다.

당위를 선호로 낮추어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 바꾸기만 해도,

마음의 숨통이 트인다.


신앙의 언어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성경은 값싼 긍정을 가르치지 않는다.

시편 저자는 대놓고 자기 마음을 붙들고 묻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시편 42:5).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주저앉아 말한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이제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상 19:4).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먼저 잠과 빵과 물을 주셨고, 안전을 마련해 주셨고,

그 후에야 고요한 세미한 음성으로 부르셨다(열왕기상 19:5-8).


위로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돌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30).

이 초대는 “힘든 게 힘들지 않다”는 최면이 아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해석의 근거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간구하신다(로마서 8:26).


그러니 ‘죽겠다’는 말이 입술에 맴돌 때, 신앙은 그 말의 주어를 바꾼다.

“나 혼자 죽겠다”에서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벅찹니다”로.

같은 무게라도 누구 앞에 올려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편 62:8).


하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새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선언은,

내가 결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는 소식이다(이사야 43:1).

이 정체성은 심리학의 자기결정성이론(SDT)과도 자연스럽게 만나며,

인간의 동기가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필요에서 자란다고 본다.


기도는 강요가 아닌 바로 자율성의 회복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의 선택에 응답하는 존재다.

유능감은 ‘잘한다’라기보다 ‘작게도 할 수 있다’는 감각에서 나온다.

오병이어처럼 가진 것이 적어도 쓰임을 받는 경험이 쌓일수록

“나는 아무것도 못 해”라는 거짓이 힘을 잃는다(마가복음 6:41-43).

관계성은 말할 것도 없다. 교회는 서로의 짐을 지는 공동체가 되라고 부름 받았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라디아서 6:2).


이 세 필요(자율성, 유능감, 관계성)가 맞물릴 때,

‘죽겠다’는 언어는 자연스레 ‘살아보겠다’는 응답으로 바뀐다.


나는 요즘 언어의 방향키를 조금씩 손봐 준다.

“죽겠다”는 말이 튀어나오면, 금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래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때로는 낮잠 20분, 따뜻한 밥 한 끼, 햇빛 10분, 누군가의 어깨, 혹은 25분짜리 작은 몰입.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도 결국 그런 것들이었다(열왕기상 19:5-8).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고 고백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그래서 나는 약함을 감추기보다, 약함 속에서 의존을 배우려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평강은 문제의 자동 해결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다른 품질의 호흡이다.

작은 실천은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노트에 두 줄을 적는다.

“오늘의 은혜 한 가지, 내일의 한 걸음 한 가지.”

거창한 결단 대신, 작은 순종들.

‘죽겠다’가 올라올 때,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문자 한 줄을 보낸다.


“당신 덕분에 오늘이 덜 힘들었어요.”

관계성은 그렇게 다시 연결된다.


업무의 태산 앞에서는 타이머를 25분으로 맞춘다.

유능감은 작은 완주에서 오히려 자란다.

일정표를 채워 넣기 전에 하나님께 묻는다.


“오늘 제가 무엇부터 하길 원하세요?”


자율성은 그렇게 다시 제자리로 온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그리고 걷다가 두려움이 치밀면,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시편 23:4).


세상은 내 편도, 내 적도 아니지만, 그분의 동행 안에서 덜 적대적으로 느껴진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담대함은 바깥의 파도가 가라앉았기 때문이 아니라,

배 안에 주인이 계시기 때문이다(마가복음 4:39-41).


입술에 맴도는 말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죽겠다”는 말이 데려가는 곳은 어둡고 좁다.

그러나 그 말이 신호가 되어 쉼과 돌봄과 동행을 다시 찾게 만든다면,

그 말은 이상하게도 생명의 통로가 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라는 잠언의 경고는 과장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말로 방향을 정하고, 그 말에 어울리는 아주 작은 행동을 하나 얹는다.

해가 나면 짚신이 팔리고, 비가 오면 우산이 팔린다.

같은 하늘 아래서, 나는 다시 살아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이 혼자가 아님을 기억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사야 41:10).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