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 2 - 운명보다 선택

권태를 건너는 작은 결단, 하나님께 맡기는 큰 신뢰

by 강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당신을 만난 건 운명이에요.”


사랑의 불꽃이 막 붙은 순간엔 무엇이든 영원할 것만 같다.

그러나 삶은 금방 일상으로 복귀한다.

가장 눈부신 감정도 우리 뇌는 곧 ‘익숙함’으로 분류한다.


심리학자 브릭먼과 캠벨(Brickman & Campbell)은 이를 "쾌락의 러닝머신"이라 불렀다.

분명히 뛰고 있는데 제자리인 듯한 느낌.

그래서 권태는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종종 인간 두뇌의 기본 설정일 뿐이다.

문제는 권태가 왔을 때 우리가 붙잡는 해석이다.

“역시 운명이 아니었나 봐.”

이 한마디가 사랑과 일과 신앙의 다음 장을 닫아버린다.


‘운명(運命)’이라는 한자를 오래 들여다보면 의외의 힌트를 얻는다.

운(運)은 옮긴다, 명(命)은 생명이다.

정해진 길에 끌려가는 수동이 아니라, 생명을 옮겨 가는 능동이 숨어 있다.

사랑도, 일도, 신앙도 우연처럼 시작될 수 있으나 지속은 선택으로 자란다.


줄리언 로터(Julian Rotter)가 말한 "통제의 위치"를 떠올려 보자.

모든 것이 외부에 달려있다고 느끼는 외적 통제위와,

바꿀 수 있는 몫을 자신에게서 찾는 내적 통제위.

뭐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위험하지만.


“이번 생은 틀렸다”는 농담이 습관이 되면 현실보다 먼저 마음이 항복한다.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이것을 "배운 무력감"이라고 말한다.

“해도 소용없어”라는 해석이 행동까지 멈추게 한다.

반대로 아주 작은 변화를 반복하면 "배운 희망"이 싹튼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해석을 바꾸며, 다음 한 걸음을 선택하는 태도다.


신앙은 이 지점에서 결을 더한다.

나의 자기 결정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 청지기의 결정이다.

요셉은 형제들의 악을 보면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세기 50:20).


그는 운명론으로 체념하지도, ‘내가 다 해냈다’고 자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큰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몫을 정확히 수행했다.


바울이 정리한 균형도 같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서 2:12-13).


내가 결정하되, 결정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바로 그 균형이 용기를 낳는다.


그래서 우리는 ‘권태’ 앞에서 결론을 내리기보다 자리 바꾸기를 시도한다.

부부 사이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한 문장을 더 묻는다.


“방금 그 말, 어떤 마음에서 나온 거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관리’의 질문 대신 '관계'의 질문을 건넨다.


“숙제했니?”보다 “오늘은 뭐가 제일 재밌었어?”

관계가 먼저일 때, 관리가 뒤따른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3).


친구와 동료에겐 판단 대신 경청을,

교회 공동체에겐 비평보다 중보를,

낯선 이웃에게는 불편함을 무릅쓴 작은 멈춤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길가에서 멈춘 10분이었다. 그렇다. 단지 10분(누가복음 10:33-37).

이렇게 미세한 선택들이 관계의 공기를 바꾼다.

사랑은 감정의 운명이 아니라, 매일 쌓이는 언약의 실천이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7).


삶의 큰 축도 다르지 않다.

나는 어느 가정, 어느 나라, 어떤 성향을 안고 태어났다.

바꿀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팔자(八字)”로 묶어버리기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정의 여지가 넓다.

누구와 시간을 보낼지, 무엇을 배우고 먹을지, 어떤 도시에서 어떤 이웃이 될지.

하루의 작은 결정을 통해 생명을 옮겨 갈 수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식탁 앞에서 조용히 뜻을 정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다니엘 1:8).

억압의 한복판에서도 선택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그의 정체성을 지켰다.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느헤미야 2:4-5).


그러고 나서 통행증과 사용할 재목과 사람을 요청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고, 계획하고, 움직였다.


야고보는 덧붙인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우리는 의지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지혜를 구한 뒤 책임 있게 선택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원하시면”(야고보서 4:15).


권태의 계절에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이 깨어나길 기다리기보다, 행동으로 공간을 비워 준다.

아침 식탁에서 눈을 맞추고 감사 한 문장을 구체적으로 건넨다.


“어제 늦게까지 운전해 줘서 고마워.”


부모에게는 잔소리 대신 안부를 먼저 묻고,

자녀에게는 한 마디 더 들어주며,

이웃에게는 작은 친절을 건넨다.

인사를 먼저 건내기,

엘리베이터 문 잡아주기,

운전하면서 양보하기.

이 미세한 결단들이 모여 가정과 골목의 온도를 바꾼다.

운명은 우리 손에 없지만, 오늘의 사랑은 분명 우리 손에 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9).


결국 질문은 한 줄로 모인다.

“나는 오늘 무엇을 옮길 것인가?”


감정이 식을 때, 계획이 어그러질 때, 우리는 생명을 옮기는 쪽을 택한다.

언어부터 선택해 보자.

“팔자”라는 말을 “부르심”으로 바꾸고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에베소서 4:1),


기도로 지혜를 구하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누가복음 22:42),


할 수 있는 작은 선을 지금 여기에서 행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시편 37:3).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디딜 때, 우리는 알게 된다.

권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권태를 건너가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의 결정은 하나님께 맡겨질수록 더욱 분명해지고 담대해진다는 것을.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6).


오늘도 나는 말과 선택으로 방향을 정한다.

운명보다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그분의 손에 맡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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