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 3 - 진짜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by 강훈

비가 퍼붓는 아침, 우리는 하늘을 멈출 수 없다.

해가 늦게 뜬다고 시간을 앞당길 수도 없다.

이런 일들은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어떤 일이 내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심각한 진단명 하나, 통보 한 줄,

갑작스러운 상실 앞에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 묻는다.

“이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사실은 이 한 문장을 먼저 말해야 한다.

"진짜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말은 체념의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직함이다.

성경도 인간의 한계를 감추지 않는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잠언 27:1).


문제는 ‘어쩔 수 없음’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이다.


심리치료는 여기서 ‘급진적 수용(radical acceptance)’이란 말을 꺼낸다.

마샤 리네한(Marsha Linehan)은 수용이 찬성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건 바로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다.

“왜 나에게?”라는 질문은 인간적이지만,

그 질문이 현재의 선택을 정지시키는 순간 우리의 고통은 더 배가 된다.

수용은 운명론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그다음 단계인

치료, 정리, 화해, 감사로 걸어갈 수 있다.


라자루스와 폴크먼(Richard Lazarus & Susan Folkman)은

위기 앞에서 사람은 두 번의 평가를 한다고 설명했다.

첫째, 이것이 위협/손실/도전인가 (1차 평가).

둘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차 평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문제중심 대처를 한다.

아프면 의사와 상의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정서중심 대처를 한다.

호흡을 고르고, 의미를 다시 묻고, 관계 안에서 마음을 진정한다.

둘 사이를 오가는 유연성이 견딜 힘을 만든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로마서 12:12).


마음이 과열될 땐 작은 기술이 도움이 된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나는 지금 두렵다/분하다/서럽다.”


매튜 리버만(Matthew Lieberman)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언어 표지가 뇌의 경보를 낮춘다.

신앙의 언어로 옮기면 이것은 탄식의 기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편 62:8).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믿음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이들은 상처 옆에서 다른 종류의 새로움을 발견한다.

테데스키와 칼훈(Tedeschi & Calhoun)은 큰 상실 후에도 일부가

관계의 깊이, 우선순위, 영적 통찰의 변화를 경험한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억지 미소가 아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예레미야애가 3:22-23).

상처가 기적처럼 사라지지 않아도, 새로움이 상처 옆에 놓일 수 있다.


일상의 예로 돌아가 보자.

교통체증은 내 분노로 풀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선택지가 열린다.

늦는다고 미리 알리거나, 창문을 열고 숨을 고르고, 붉은 신호마다 짧게 기도한다.

짜증을 부리고 욕을 내뱉는다고 도로가 원활해지지는 않는다.


교통체증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후의 작은 선택들이 긴장을 풀어 준다.

‘어쩔 수 없음’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자세를 바꾸고, 반대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심호흡을 하고, 기도할 수 있다.


신앙은 수용을 넘어서 맡김으로 완성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전도서 7:14).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왜 허락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신명기 29:29).


그러나 알지 못해도 의지할 수는 있다.

하박국은 결핍의 한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택이다.


받아들이는 법을 훈련하는 가장 오래된 영적 장치 중 하나는 안식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다”(창세기 2:2-3).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마가복음 2:27)이라 하셨다.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주일에 하루 몸으로 인정한다.

쉬는 날은 뒤쳐짐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안식은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신앙의 원형을 삶에 새긴다.


바람의 방향은 바꿀 수 없어도 돛의 각도는 바꿀 수 있다.

큰 배도 아주 작은 키로 방향을 잡는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야고보서 3:4).


내일의 바람이 어떻게 불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키는 내 손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순서를 되짚는다.

먼저 사실을 인정한다.

오늘은 아프다, 늦는다, 두렵다. 이어서 맡긴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야고보서 4:15).


그리고 작게 움직인다.

전화 한 통, 약속의 조정, 휴식과 치료, 한 줄의 기도.

이런 작은 걸음이 ‘어쩔 수 없음’의 벽을 괜찮다는 문으로 바꾼다.


결국 남는 고백은 단순하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겨 드리며,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선(善)을 내 삶을 향해 행한다.

스스로를 함부로 몰아붙이지 않고, 주께서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 성실히 걷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그러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바람은 여전하지만, 내가 흔들리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내 때는 주의 손에 있고,

그 손 안에서 오늘의 나는 충분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시편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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