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아닌 다름
둘째 녀석이 흥분하면서 집에 들어왔다.
"아빠, 아빠 나 완전 대박이야."
고작 초등 1학년 생의 말투다. 정말 좋은 일이, 엄청난 일이 생겼나 보다.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칭찬을 받은 것을 자랑한다. 가져온 그림을 보는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내가 아빠라서 마냥 잘 그린 것처럼 보이는 거지, 객관적으로는 어떤지 솔직히 모르겠다. 미술에 소질이 있다고 말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대놓고 말하기엔 아이가 실망할 것 같아서 칭찬을 해주었다. 애들은 눈치가 빠르다. 내 칭찬에 딸아이는 이렇게 반응했다. "아빤 정말 영혼이 없어." 딱 들켰다.
그렇게 아이가 미술에 소질이 있는지 의문으로 남기고 지내던 어느 날, 동네 상가의 빈 점포에 새로운 뭔가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좀 생소한 인테리어였다. 뭔지 궁금해서 유심히 보니 조그맣게 오픈 예정 안내가 쓰여 있다. "4월 말 오픈, OO도예”"왠지 느낌이 쎄 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은 생각보다 많이 적중한다. 드디어 OO도예가 오픈했다. 도예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곳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물론 그런 용품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가장 주력 콘텐츠는 도예 수업이었다.
둘째 녀석은 바로 삘이 꽂혀서 보내 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애들이 아무것도 관심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 자기가 하겠다는데, 심지어 게임도 아니고 뭔가를 배우겠다는데 당연히 해줘야겠다 싶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적중한 셈이다. 교육 비용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비쌌다. 생전 그 분야를 해본 적도 시켜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주변에 그 분야에 대해 아는 지인도 없으니 알 수가 있나. 그래서 더 비싼 느낌이었는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두 번 가는 프로그램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타협을 했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나서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바로 선생님의 첫 수업 피드백이었다.
"아이가 도예에 타고난 것 같아요. 정말 감각이 엄청나요. 물레를 처음 해봤는데 망치지 않고 성공하는 아이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냥 잘한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천재적인 무언가를 타고났다는 것이고, 이 참에 진로까지 그쪽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첨부했다. 보통 이런 멘트는 설령 의도적이라고 해도 거부하거나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물론 듣기 좋은 소리여서 기분이 좋다. 내 자식이 뭔가 잘한다는데 싫은 사람이 있을까? 장사속이라고 하기엔 타이밍도 괜찮았다. 어차피 결제하고 시작된 마당에 립서비스를 그렇게 과하게 날릴까 싶기도 했으니깐. 그래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고작 수업을 한 번 하고 이렇게 들이대는 건가?' 더 근본적인 고민도 생겼다. '도대체 미술 쪽의 영혼은 누구를 닮은 것일까?' 아내는 클래식 성악을 전공했고, 나는 음악 전공은 아니지만 제법 오랜 시간 곡을 쓰면서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음악 분야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미술 쪽은 정말 의외였다. 심지어 가족, 친척 그 어떤 방향으로 여러 갈래를 펼쳐 봐도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문득 내 어린 시절의 사건이 떠올랐다.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미술 재능이 있었지만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던 그 사건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대략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예전 초등학교 미술교육의 저학년 단계는 이렇다. 일단 1, 2학년 때에는 특별한 것 없이 한 두 가지 대상을 그린다. 엄마, 아빠, 가족을 그리거나 동물을 주로 그린다. 그리고 3학년이 될 때까지는 주로 크레파스로만 색칠을 한다. 물감을 쓰기엔 아직 어린 셈이다. 4학년이 되면 드디어 물감이 준비물에 포함된다. 모나미 물감과 알파 물감이 물감계의 양대산맥이었다. 4학년이 되자마자 물감이 적극적으로 투입되지는 않는다. 4학년 때 주로 하는 수채화 기법은 바로 크레파스와 물감의 혼용이다. 일단 대략적인 스케치를 연필로 하고, 크레파스로 주요 부분을 색칠한다. 그러고 나서 수성물감으로 덧칠을 하는데, 신기하게도 크레파스의 성분과 수성 물감의 성분이 상극이어서 물감을 연하게 덧칠하면 크레파스를 칠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분리가 된다. 그러면 나름 알록달록 그럴듯한 색깔이 연출된다. 하늘을 표현할 때에도 구름을 흰색 크레파스로 색칠을 해주고, 바탕을 하늘색 물감으로 칠하면 크레파스를 칠한 구름 부분은 묽은 수성 물감이 묻지 않고 자연스럽게 분리되면서 연출된다. 주로 자연 풍경을 그릴 때 그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누가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발한 기법이다. 난 개인적으로 크레파스와 물감의 혼용법이 너무 신기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너무 멋있었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일 때에는 마치 마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하는데 어떻게 색이 섞이거나 번지지 않지?'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얼른 그 방법으로 해보고 싶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쓱쓱거리는 연필 스케치 소리가 도드라지게 들렸다. 나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하늘에 구름도 넣고, 눈부신 태양도 그려 넣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역시 커다란 나무다. 굵은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그 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여러 가지 색깔을 크레파스로 입히고 나서 물감을 쓱싹쓱싹 바르면 정말 멋지게 완성이다. 난 집중해서 나무 기둥을 크레파스로 힘을 꾹꾹 줘 가면서 꼼꼼하게 색칠하기 시작했다. 물감을 마술처럼 덧칠할 생각에 너무 설레었다. 그때였다. 아이들의 그림을 살펴주기 위해서 교실을 느릿느릿 순회하던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자마자 뒤통수를 냅다 내리쳤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지만 그때에는 그런 폭력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시대였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미개했다. 빡 소리가 날 정도로 뒤통수를 맞고 나서 그 아픔을 채 느끼기도 전에 선생님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야 이놈아, 나무에 불났냐? 왜 나무 기둥을 빨간색으로 칠하는 거야?"
그렇다. 난 나무 기둥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왜 그랬냐고? 난 그게 갈색인 줄 알았다. 난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난 "적록색약"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색약이었다. 그래서 난 빨간색과 갈색이 헷갈렸던 것이었다. 색약이 아니거나 색약인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될 거다. 여기서 짧게 얘기하자면 색약은 색을 못 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특정 색깔이 좀 다르게 보이는 거다. 그래서 특정 색깔에 대해서 약하다고 해서 "적록색약"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다시 말하지만 색깔을 못 보거나 아예 구분 못하는 그런 종족은 아니다. 더군다나 내가 색약이라는 것은 6학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령 일부러 빨간색으로 색칠을 했다고 그게 맞을 일인가?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아주아주 말이 되는 상황이다. 나무 기둥은 빨간색이면 안 되는 시대였다. 하늘은 무조건 하늘색으로 칠해야 한다. 실제로 하늘은 노을이 질 때에는 붉고 노랗지만 노을이 주제가 아닌 이상 그래선 안되고, 역시 밤이 주제가 아닌 이상 밤엔 하늘이 당연히 까맣지만 그것도 안된다. 그냥 하늘을 표현할 때에는 하늘색이어야 했다. 사람을 색칠할 때에는 피부는 무조건 살색을 해야 맞는 거다. 머리는 검은색을 무조건 칠하는 게 맞는 거다. 요즘 같으면 아마도 선생님이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다.
"우리 친구가 나무를 빨간색으로 색칠을 했네? 너무 멋진데? 근데 왜 빨간색으로 색칠했는지 한 번 말해볼까?"
대략 이렇게 물어보면서 오히려 창의적이라고 칭찬해주는 것이 요즘 교육이 아니던가? 난 정확히 그날, 미술계를 떠났다. 나의 새로운 시선과 나만의 색깔 감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더러운(?) 바닥에 더 이상 속해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초등 4학년이었던 바로 그날, 대한민국은, 아니 전 세계는 뛰어난 창의력을 보유한 미술계의 천재적인 샛별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슬픈 일이도다 - 100퍼센트 농담이니 오해 없으시길.
둘째 녀석의 재능이 그냥 상술로 인한 포장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나 보다. 그러려면 부모 중 누군가는 미술적인 감각과 재능이 있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그래서 난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딸아, 그 옛날에 이 아빠는 천재적인 미술적 재능을 소유한 그런 아이였단다. 그리고 넌 나를 정말 쏙 빼어 닮은 거란다. 하하하"
나의 색약을 두 딸 모두 신기해한다. 그래서 여전히 색깔이 다양한 옷을 입으면 쫓아와서 손으로 콕콕 가리키면서 무슨 색인지 맞추라고 묻는다. 평소 제대로 못 맞췄던 애매한 색깔을 맞추기라도 하면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준다.
"오올, 아빠 제법인데?" 이러면서 말이다.
색약은 어떤 면에서는 결핍이다. 물론 난 스스로 그게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시선과 다른 세상을 보는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을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가 보는 건 진짜 본질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어쩌면 내가 보는 세상의 색과 당신이 보는 세상의 색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은 심각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이게 힘들어서 색약 보정렌즈를 사용하거나 색깔을 그 뉘앙스로 외워서 안 그런 척하기도 한다. 물론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아니다. 그냥 나에겐 재미있는 에피소드의 제공 요소가 색약이다. 그것만으로도 난 좋다. 색약인 나도 좋고, 천재적인 미술계의 이단아로 자칭하며 자뻑하는 것도 좋다. 이렇게 말이다.
'내가 미술계를 떠난 게 아닌가? 아마 미술계가 날 놓친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