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과 타이밍의 중요성 인정하기
딸아, 네가 에세이 대회에 참여했을 때가 기억이 나.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영어로 에세이 대회를 준비해야 해서 힘들었을 거야. 미국에 온 지 고작 2년 좀 넘었을 때니까 말이야. 더구나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팀을 이루어서 대회에 참여했었지.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 제일 높은 단계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그 정도도 대단하다고 아빠가 말했었지. 그건 정말 진심이었어. 너도 괜찮다고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쉬움도 있었을 거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자료 준비하고, 학교 갔다 와서 또 자료 찾고 글을 쓰고, 시차가 다른 한국의 친구들과 토론하고 함께 연구하는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을 거야. 다음엔 더 잘될 거라고 아빠가 말했지만 네가 고생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다시 도전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 정도 노력을 했는데 세미 파이널에서 멈추었다는 것은 좀 아쉽더라. 아빠 기준으로는 네가 딱 우승감인데.
우승한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는 몰라. 정말 객관적으로 잘한 것인지.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 자신의 1순위 언어가 아닌 영역으로 도전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일이야.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노력을 엄청나게 한다고 해서 무조건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아빠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내가 딱 적합할만한 구인 공고가 있어서 지원한 적이 있었어. 그곳에서 요구하는 것과 정말 딱 맞아떨어지더라고. 내가 경험한 일들과 쌓아 놓은 스펙들을 생각하면 충분하게 날 채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그곳에서 일할 것처럼 다른 환경들도 준비하려고 했어.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어.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내정된 사람이 있었던 구인 공고였어. 사실상 구인을 위한 공고가 아니라 모양새를 맞추기 위한 것이지. 세상은 그러기도 해.
그때 선배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인생은 포커 게임 같아서, 좋은 패를 받는 것도 실력이지만
나쁜 패로 잘 버티는 것도 실력이야.”
그때는 위로가 안 됐는데,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전에 내가 잘 아는 대학교 동기가 어떤 회사의 임원으로 가게 되었어. 내 경력과 이력을 생각해도 아빠보다 좀 부족했던 동기였거든. 물론 경력과 이력은 다가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지. 저 친구도 저런 좋은 회사에 심지어 임원으로 가는데, 난 왜 아직도 평사원인가 하고. 솔직히 처음엔 좀 억울했어. 아빠가 더 열심히 했는데 왜?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친구 아버지가 회사 사장이었더라. 그날 밤 소주를 마시면서 생각했어. 아, 애초에 다른 게임이었구나.
너 삼촌 이야기 해줬던가? 의대 7번 떨어졌어. 매번 0.몇 점 차이로. 그런데 8번째 도전하던 해에 수능 제도가 바뀌었어. 삼촌한테 유리하게. 그해 붙었지. 7년의 노력이 헛된 게 아니었지만, 합격은 제도가 바뀐 ‘운’ 덕분이었어.
아빠 외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어.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 참고로 그 당시 외할머니는 종교도 없었어.
농부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가뭄이 들면 소용없다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할머니는 그래도 매일 밭에 나가셨어. “그럼 왜 매일 나가서 밭일하세요? “라고 물으니 “비가 왔을 때 준비된 밭이어야 하니까”라고 하셨지. 정말 탁월한 통찰력 아니니? 흔히 어떤 운명이나 운에 맡긴다는 표현을 할 때, 그것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야. 그런 유머도 있잖아.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로또 당첨을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응답을 했다는 거야.
"그래, 로또 당첨이 되게 해 주마. 근데 너는 언제 로또를 살거니?"
말 그대로 운이나 기적을 바라면서 자기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야.
어떤 사람은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데 미술 대학에 떨어지기도 해. 어떤 사람은 노래를 정말 끝내주게 부르는데 오디션날 감기 걸려서 컨디션이 엉망이어서 망하기도 하고. 반면 어떤 사람은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공부도 열심히 안 했는데 대기업에 들어가기도 해. 오디션 하는 날 심사를 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어서 오디션을 통과하는 사람도 있거든. 이게 인생이야.
아빠가 젊을 때는 이런 게 너무 억울했어.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을까.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나이 들면서 깨달았어. 공평하지 않은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더라.
벚꽃도 다 같이 피지 않잖아. 어떤 나무는 일찍, 어떤 나무는 늦게. 같은 날씨, 같은 햇빛을 받는데도. 그게 잘못된 걸까? 아니지. 그냥 각자의 시간이 다른 거야.
가수 윤종신이 만든 노래 중에 "지친 하루"라는 곡이 있어. 거기에 이런 가사가 있다.
"부러운 친구의 여유에 질투하지는 마. 순서가 조금 다른 것뿐"
맞아. 그런 거야. 순서가 조금 다른 것일 뿐이야.
네가 한 달 동안 다이어트했는데 1kg도 안 빠졌다고 울었잖아. 그런데 동생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하나도 안 찐다고 억울해했지. 정말 불공평해 보이지? 그런데 너는 감기를 잘 안 걸리는데 어떤 친구는 감기에 자주 걸려. 아마 네가 미국에 와서 사는 것도 한국에 있는 너의 친구들은 엄청 부러워할 거야. 그것도 불공평한가? 우리는 각자 다른 몸, 다른 유전자, 다른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어.
그렇다고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야.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실패했을 때 “내가 부족해서”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때로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운이 없어서, 상황이 달라서 그런 거야. 네가 얼마 전에 “아빠, 왜 난 이렇게 운이 없을까?“라고 했을 때, 아빠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운도 돌고 도는 거야. 지금 네 차례가 아닐 뿐이야.”
바람이 불지 않으면 연을 날릴 수 없어. 그런데 바람이 불 때 연이 없어도 날릴 수 없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연을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거야. 언제 바람이 불지 모르니까.
네가 “열심히 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해?“라고 물었지. 아빠도 답을 찾는 중이야. 다만 이것만은 확실해. 안 되는 날도 있고, 되는 날도 있어. 그게 인생이야.
오늘도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어려운 영어 단어도 살펴보고, 자료들을 찾기 위해서 노트북도 만져보는 너의 모습을 봤어. 에세이에서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네가 좋아하는 영역, 네가 하고 있는 공부와 너의 삶에 대한 네 마음은 진짜잖아.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한 건 아닐까?
내일은 오늘보다 운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어.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매일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거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는 네가 있어서 운이 좋아.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