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형편이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립보서 4:11)
휘발유 값이 오르면 집집마다 표정이 어두워진다. 뉴스는 파생효과를 길게 읊고, 마음은 금세 쪼그라든다. 그런데 값이 내려갈 때는 이상하다. 잠깐 “다행이네” 하고는 곧바로 잊는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말한 "손실회피(loss aversion)" 때문이다. 사람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에 훨씬 더 예민하다. 떨어지는 건 크게, 좋아지는 건 작게 느낀다. 미세먼지가 나쁠 때는 세상이 끝날 듯하고, 하늘이 맑아지면 “원래 이래야지” 하며 지나친다. 좋은 것은 ‘기본값’이 되고, 결핍만 확대된다.
믿음의 언어로 바꾸면, 우리는 주신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고(“일용할 양식”, 마 6:11), 거둬 가신 것처럼 보일 때만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12)라고 했다. 자족은 형편이 바뀌어야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때 자라나는 훈련이다. 값이 오르든 내리든, 하늘이 흐리든 개이든, "근원"은 여전하다는 사실.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오나니”(약 1:17).
공급의 파도는 출렁여도 공급자의 신실하심은 출렁이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숫자에 휘둘렸다. 리터당 100원이 오르면 마음도 함께 오르고, 내려가면 금세 무감각해졌다. 어느 날, 기름을 넣고 차창 너머로 저녁하늘을 보다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오늘도 여기까지 오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죠. 오르든 내리든, 제가 의지할 건 가격표가 아니라 주님의 손입니다.”
묘하게도 그날부터 같은 가격표가 마음에 덜 파문을 냈다. 숫자를 무시했다는 뜻이 아니다. 숫자 위에 서 계신 분을 먼저 떠올리면, 숫자가 최종 통치자처럼 굴지 못한다.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는 주문이 아니다. 가계부는 펴야 하고, 알뜰살뜰 조절도 해야 한다. 다만 첫 줄에 무엇을 적느냐가 차이를 만든다. 첫 줄을 “또 올랐다”로 시작하면 하루가 좁아진다. 반면에 첫 줄을 “오늘 하루를 주심”으로 시작하면 같은 현실이 다른 차원이 된다.
심리학자들이 말한 손실회피가 우리 본성이라면, 복음은 그 본성을 부드럽게 교정한다. 잃은 것의 목소리만 키우지 말고, 받은 것의 이름을 불러 보라. “숨을 쉬게 하심, 따뜻한 밥상, 함께 웃을 얼굴, 오늘의 일거리, 돌아갈 집.” 바울이 배웠다는 자족은 바로 이런 영적 근력이다. 상황이 주는 감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의미로 사는 힘.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속에 작은 표지판 하나를 세워 두었다.
“계절은 변해도, 공급은 위에서 온다.”
가격은 오르내리고, 뉴스는 요란하지만, 감사는 우리 편에서 결심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결심이 쌓이면 똑같은 하루가 다른 층위를 갖는다. 숫자에 눌려 사는 Normal Level(평범 레벨)에서, 은혜를 먼저 읽는 Another Level(다른 차원의 레벨)로.
오늘 주유소 앞을 지나며 이렇게 속삭인다.
“주님, 제가 가진 것들 위에 적힌 이름이 당신의 선물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를 때도, 내릴 때도 -당신은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동일하시니(히 13:8), 제 마음은 그 동일하심에 닻을 내립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가계부 맨 위에 한 줄을 적는다.
“오늘도, 공급자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