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세기 50:20)
고정관념은 사람에게만 붙는 게 아니다. 사건에도 고정관념이 있다. 비가 오면 자동으로 “짜증 나”로 번역하고, 지연 알림이 뜨면 곧장 “오늘 왜 이러지”로 결론 내리는 마음의 습관. 같은 유형의 일이 올 때마다 같은 해석을 던져 넣는 자동문장. 나는 이걸 ‘사건 고정관념’이라 부른다. 신앙은 바로 그 자동문장에 쉼표 하나를 찍게 한다. 정말 망한 걸까, 아니면 아직 문장이 끝나지 않았을까?
첫아이를 기다리던 어느 날, 아내가 배를 토닥이며 말했다. “너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힘들다.” 서늘하게 마음을 스치는 문장이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거기엔 사건 고정관념이 숨어 있었다. 몸이 무거워지고, 잠이 얕아지고, 삶이 무너지는 듯한 이 고됨은 “너 때문에”라는 원인항에 묶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장을 고쳐 보자고 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널 위해서 엄마가 이렇게 애쓴다.’” 단어 하나가 바뀌자 공기가 달라졌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고통의 성격이 바뀌었다. ‘때문에’는 원인과 피해를 부르고, ‘위해서’는 의미와 헌신을 부른다. 사건은 그대로인데, 사건을 부르는 이름표가 달라지면서 방향이 달라졌다.
심리학은 이 차이를 ‘설명 양식(Explanatory Style)’이라 부른다.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에 따르면, 같은 실패를 두고도 어떤 사람은 “영원하고 전반적이며 내 잘못”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잠깐의, 특정한, 조정 가능한 일”로 해석한다. 후자일수록 회복력이 높다. 또 감정조절 연구자 제임스 그로스(James J. Gross)는 ‘인지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라는 단어로 이 전환을 설명한다. 사건을 다시 해석하는 작은 움직임이 감정의 온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신앙은 여기서 한 발 더 간다. 재평가의 자리에 섭리를 놓고,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는 긴 호흡을 기억한다. 그래서 ‘때문에’에서 ‘위해서’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다스림’으로 문장이 열린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의도적으로 내 안의 자동문장을 살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약속에 늦었을 때, “비 때문에”라고 말하고 싶은 혀끝을 붙잡아 본다. “일기예보 덕분에" 더 일찍 나오는 습관을 배우는 중이다. 차가 막히는 출근길에선 “교통 체증 때문에” 대신 “지하철 덕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로 연습한다. 이건 억지 긍정이 아니다. 내 해석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훈련이다.
이 전환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요셉도 “해하려 하였으나”를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악의는 악의로 남아 있었다. 다만 그 악의가 끝이 아니었다. 신앙의 눈은 고통을 해체하지 않고, 고통을 경유해 선으로 바꾸시는 더 큰 문장에 나를 들여놓는다. 그래서 ‘때문에’의 문법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대신 ‘위해서’의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돌린다. 비는 비였고, 그날의 지각은 지각이었다. 동시에 그날은 내가 ‘미리 움직이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했다. 사건의 손해만 적금처럼 부으며 사는 삶을, 의미의 적금으로 갈아타는 작은 결심을 하는 것이다.
나는 실패 앞에서 이 주문을 더 자주 사용한다. 글이 망가진 날, “시간 때문에”가 아니라 “한 문장을 다듬기 위해서 오늘은 더 배웠다.” 관계가 어긋난 날, “너 때문에”가 아니라 “서툰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경험한 시간이었다.” 이 주문을 하루에 몇 번이나 중얼거리다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몸이 그 문장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의 삶 앞에서 나도 같은 문장을 건네게 된다. “그 일이 너를 괴롭혔지만, 그 일을 통해 네가 깊어졌구나.”
물론, 모든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덮을 수는 없다. 폭력과 착취, 타인의 자유를 해치는 악에겐 ‘위해서’라는 말이 값싼 면죄부가 된다. 그럴 땐 멈추고, 선을 긋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위해서’의 문법은 책임을 흐리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정직하게 밟는 발걸음 위에서만 힘을 가진다. 요셉의 문장에도 시간이 있었다. 오해와 누명을 지나, 긴 침묵의 계절을 견뎌낸 뒤에야 “선으로 바꾸사”가 완성됐다. 사건 고정관념을 푸는 일도 그렇다. 오늘 당장은 말맛이 어색하고, 혀가 자꾸 ‘때문에’로 새지만, 내일은 덜 어색해진다.
이 작은 훈련은 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해석학적 순환"이다. 전체가 부분을 비추고, 부분이 전체를 바꾼다. 신앙은 그 순환의 바깥에서 전체를 붙들어 준다. 내가 다 보지 못하는 전체 속에서 지금의 이 부분을 해석하게 한다. 그래서 ‘때문에’의 좁은 문장이 ‘위해서’의 넓은 문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의 서사에 접속된다. 그때 비로소 사건은 내 인생의 낙인이 아니라, 나를 길들이는 교사가 된다.
다시 생각해 본다. 고정관념과의 싸움은 사람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사건에 붙이는 낙인부터 풀어야 한다. ‘비 때문에’에서 ‘비를 통해’, ‘너 때문에’에서 ‘너를 위해서’. 문장을 바꾸면 마음의 어조가 바뀌고, 마음의 어조가 바뀌면 발걸음이 달라진다. 오늘도 자동으로 찍히려는 도장을 잠시 멈추고, 다른 이름표를 붙여 본다. 같은 비지만, 같은 늦음이지만, 같은 고단함이지만 - 하나님이 바꾸실 선을 향해 열린 문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