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마가복음 7:15)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다. 욕조에서 아이와 놀다가 급한 신호가 왔다. “아빠… 응가…”
본능처럼 손이 먼저 나갔다. 욕조 물속으로 떨어지기 전에 덥석 받아냈다. 신기했다. 놀랄 법한 장면인데, 이상하게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상황이 지나고 나니 그날은 우리 집의 “전설”이 되었고, 아이는 중학생이 된 지금도 그 얘기만 나오면 기겁을 한다. 하지만 내 마음속 제목은 여전히 같다. 사랑이 냄새를 바꾼 날.
똥은 본래 더럽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날 배운 건 이것이다. 상황의 값은 사물의 성질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누구의 손에,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불교 고전의 일화로 유명한 원효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이 역전을 잘 보여준다. 밤중엔 갈증을 없애 준 시원한 물, 아침에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대상은 같았지만 지각과 의미가 바뀌니 경험 전체가 뒤집혔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면, 세상을 더럽히는 힘은 바깥의 사물보다 먼저 내 마음의 해석에서 나온다(막 7:15).
심리학도 그런 변화를 뒷받침한다. 리처드 라자러스(Richard Lazarus)의 평가 이론(appraisal theory) 은 사건 자체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감정과 행동을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제임스 그로스(James J. Gross)의 재평가(reappraisal) 연구는, 불쾌한 자극을 새로운 의미로 다시 읽을 때 스트레스 반응이 완화되고 회복탄력성이 높아진다고 보고했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나치 수용소에서조차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마지막 자유를 이렇게 말했다.
“상황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는 의미를 선택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불쾌함을 미화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더러운 건 더럽고, 치워야 한다. 다만 더러움만 보이느냐, 사랑할 이유를 함께 보느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날 내 손이 더러워졌지만, 내 마음은 더 맑아졌다. 왜냐하면 나는 “더러움을 치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엔 “본래 더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업무의 자잘한 뒷정리, 부모님 병원 동행, 새벽에 울어 깨는 아이 곁 지키기, 관계의 어색한 침묵 메우기…. 그 순간들을 “번거로움”으로만 읽으면 마음이 먼저 지친다. 그러나 같은 일을 사랑의 언어로 재명명해 보자.
“남이 하기 싫어 미루는 허드렛일”을 “내가 솔선수범하는 차원의 섬김”으로.
“끝이 없는 간병”을 “사랑하는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는 예배”로.
“관계의 뒷수습”을 “사랑을 다음 장으로 넘기는 지혜로운 편집”으로.
이건 자기 암시가 아니다. 관점의 훈련이다. 신앙은 이 훈련의 토대를 넓혀 준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동일한 행위가 영광이라는 큰 문맥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사소함 속에서 의미의 심지를 다시 세운다.
작은 실습을 권하고 싶다. 오늘 하루 “본래 더러운”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속으로 짧게 기도하며 이렇게 이름 붙여 보자.
“지금 나는 사랑의 섬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자. 기저귀를 갈고, 싱크대를 정리하고, 미안했던 메시지를 보낸다. 사랑은 생각보다 손에 가깝다. 손이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온다.
성공은 화려한 성취의 합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원치 않는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떤 지혜를 발견하는가가 더 정확한 척도일 것이다. 세계의 부를 순위로 매길 수는 있어도, 세계의 성공을 순위로 매길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보면 알게 된다. 우리가 가장 힘들다고 여겼던 날들이, 사실은 내가 사랑을 배우던 날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묻자. 똥이 항상 더러운가?
응, 치울 땐 더럽다. 하지만 사랑이 닿으면, 더러움은 사라지고 관계만 남는다.
그 남은 것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