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 3 - 갈등의 역설

by 강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언 27:17)


딸이 중 1 때 학교 농구 동아리 이야기를 꺼냈다. 남녀로 팀을 갈라 게임을 하는데 아쉬운 게 있었나 보다. “남녀로 팀을 나누니깐 너무 재미없어.” 평균 키가 비슷하지 않다 보니 힘이 빠진단다. 그 나이 때에는 보통 여자 아이들이 훨씬 크다. “선생님께 말씀드려 볼까?” 하고 묻자 딸은 망설였다. “괜히 찍히면 어떡해…”


그 마음을 안다. 나도 갈등을 좋아하진 않는다. 누가 좋아하겠나. 그런데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갈등을 피하면서 얻을 수 있는 변화는 거의 없어. 그리고 갈등은 꼭 ‘싸움’만을 뜻하진 않아.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불편함도 갈등이야. 그 불편함을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


갈등은 늘 두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하나는 상처를 남기는 얼굴, 다른 하나는 성장을 데리고 오는 얼굴.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은 종종 불편을 통로 삼아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이 상처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순간이 끝이 아니라 통과로 쓰일 수도 있음을 믿게 한다.


심리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다. 캐럴 드웩(Carol Dweck)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연구는 실패와 충돌을 “나의 정체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기술을 배우는 과정”으로 보는 태도가 학습과 회복탄력성을 키운다고 말한다. 가정, 직장에서의 갈등 연구에서도,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과제와 절차를 둘러싼 건강한 긴장은 성과와 창의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들이 반복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이 공동선을 향한 비폭력 운동의 동력이었다고 고백했다. 요컨대, 갈등 자체가 더럽거나 나쁜 게 아니라 다루는 방식이 문제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우리는 갈등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나는 세 가지 그림을 마음에 붙여둔다.

첫 번째로 ‘철이 철을’을 떠올리기.
잠언의 이미지는 부딪힘을 전제한다. 마찰이 없으면 날은 무뎌진다. 상대의 다른 생각이 나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일 수 있다. “왜 남녀를 나누죠?”라고 묻는 딸의 마음도, 선생님의 나름의 기준도, 서로의 날을 세우는 철이 될 수 있다. 먼저 마음속에서 상대에게 "선의(presumption of goodwill)"를 부여해 보자. 내가 붙이는 첫 느낌과 표시가 결과의 절반을 정한다.


두 번째로 ‘관계는 지키고, 주제는 분리’.
부부 연구로 유명한 존 가트맨(John Gottman)은 갈등의 순간에 건네는 "작은 수리 시도(repair attempt)" - “잠깐만, 내가 흥분했네. 다시 말해볼게” - 가 관계의 방향을 바꾼다고 말한다. 신앙의 말로 바꾸면, “진리와 사랑이 입 맞추는 법”(엡 4:15)을 연습하는 것. 논점은 또렷하게, 사람은 따뜻하게. “선생님, 팀을 섞어 보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는 주제에 머무는 문장이다. “왜 늘 그렇게 하세요?”는 사람을 건드리는 문장이다. 같은 제안이지만 결이 다르다.


세 번째로 ‘내 안의 작은 두려움과 악수’.
갈등이 무서운 건 바깥의 상대 때문만이 아니다. 내 안의 거절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니 기도할 때 이렇게 고백해 본다. “주님, 두려워도 가겠습니다. 정중하고 담대하게.” 신앙은 불안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불안을 품고도 한 걸음 내딛게 하는 힘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며칠 뒤 딸과 다시 이야기했다. 결국 선생님께 정중하게 건의했고, 다음 주에 혼합 팀으로도 한 번 해 보기로 했단다. 큰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의 세계에선 작은 승리였다. 내 안에도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둘은 알았다. 갈등은 꼭 피해야 할 재난만은 아니라는 걸. 때로는 관계를 배울 기회, 의견을 건강하게 내는 연습장, 나를 다음 단계로 밀어주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돌아보면, 신앙의 역사도 그런 역설로 움직였다. 광야의 굶주림은 만나를, 포로의 눈물은 귀향의 노래를 낳았다. 갈등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도 짧아지고, 관계는 얇아지고, 믿음은 평평해진다. 반대로 갈등을 성숙으로 길들이면, 같은 사건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왜 하필 지금 나에게?”“지금이라서, 나에게”로 바뀐다.


혹시 오늘도 마음 한켠에 작게 불편한 결이 느껴진다면, 그걸 무시하지 말고 조용히 이름 붙여 보자.
“이건 싸움이 아니라 성장의 초대장이야.”
그리고 아주 짧은 기도를 더하자.
“주님, 내 말은 부드럽게, 내 뜻은 단단하게 인도하소서.”


갈등은 우리를 망가뜨리려는 벌이 아니다. 곤란하게 만드는 적도 아니다. 잘 다루면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선물이다. 철과 철이 스칠 때 나는 소리가 조금 거슬리더라도, 그 끝에 빛나는 날이 생긴다. 그리고 언젠가 그날은,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칼이 아니라 선물 상자의 얇은 포장지를 조심스레 여는 작은 칼이 될 것이다. 서로의 선의를 열고, 더 나은 내일을 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