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밤에 강연 영상을 보다가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당신은 소중합니다.” 화면 속 말이 가슴에 떨어지면 잠깐은 숨이 놓인다. 문제는 다음 날이다. 알람은 그대로 울리고, 풀지 못한 서류는 여전히 책상 위에, 마음의 멍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다. 그때 깨닫는다. 위로는 파도처럼 다녀가고, 삶은 발로 걸어야 바뀐다는 것을.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다. 마음이 움직이길 기다리기보다 몸을 먼저 움직일 때 마음이 따라온다고. 우울 치료의 한 기둥인 ‘행동 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 C. Jacobson)’가 그렇다. 기분이 좋아져서 걷는 게 아니라, 걷기 시작해서 기분이 조금씩 달라지는 법.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감동’이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순종이 길을 만든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다리를 놓는 건 작은 실천이다.
내가 가장 깊게 배운 때도 그랬다. 마음이 산처럼 무너지던 계절, 기도하며 “주님, 살려 주세요”만 반복했다. 어느 날 목사님의 한 문장이 걸렸다. “오늘 하나만 하세요. 씻기, 산책 10분, 사과 한 마디, 작아도 좋습니다.” 그날 나는 설거지 통을 비웠다. 아무 일도 아닌 듯 보이지만,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마음이 아주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날은 동네 한 바퀴. 그다음 날은 마음에 걸리던 사람에게 문자 한 줄. 기도는 여전히 길었고 눈물은 여전했지만, 손과 발이 내 믿음을 끌고 갔다. 그때 처음 알았다. 힐링은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습관의 개혁이라는 것을.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자유가 “시작하는 능력(natality)”에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시작은 웅장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은 “오늘 한 걸음”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온다. 복음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연민을 느꼈다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가갔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다(누가복음 10장). 사랑은 감정이 맞아떨어질 때 생기는 열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손에서 증명된다.
물론 위로의 말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의 "자기 자비(self-compassion)"는 “다정함”이 회복의 토양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토양만 바라본다고 씨앗이 자라지 않는다. 씨앗을 심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ACT(수용전념치료, S. Hayes)가 말하는 것도 결국 같다. 소중한 가치를 정하고, 마음이 흔들려도 그 가치 쪽으로 작게 전진하는 것. 신앙 안에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걷는다’고 부른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우리는 때때로 “괜찮다”는 말을 진통제처럼 삼킨다. 아프지 않은 척, 참 괜찮은 사람인 척. 그런데 진통제가 뼈를 붙여 주지는 않는다. 뼈는 깁스를 해야 붙는다. 마음도 그렇다. 깁스는 구체적이다.
이렇게 해보자. 오늘 10분만 늦게 자고 시편 한 편 소리 내어 읽기. 미뤄 둔 전화 한 통 걸어 사과하기. “미안해, 그날 내 말이 심했어.” 잠들기 전, 감사를 세 가지 기록하기.
이건 할 일 목록이 아니라 “주님, 제가 오늘은 이렇게 해 보겠습니다.”라는 기도의 자세다.
그리고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시도하면 된다. 회복탄력성(resilience) 연구자 앤 매스턴(Ann S. Masten)은 회복을 “평범한 마법(ordinary magic)”이라 불렀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반복이 만들어 내는 기적. 신앙에서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매일 작은 순종을 올려놓을 때, 은혜는 느낌이 아니라 결과로 스며든다. 조금 덜 예민해진 나, 조금 더 유연해진 관계, 조금 더 깊어진 기도.
힐링은 ‘좋아졌다’는 기분이 아니라, 어제보다 한 걸음 바뀐 일상이다.
말씀을 듣고 눈물 흘린 자리에서, 말씀을 행하며 삶을 고친 자리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이런 한 문장일지 모른다.
“괜찮아질 거야.”가 아니라 “같이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