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사무엘상 16:7)
동네 편의점에 새로 온 야간 직원이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팔에는 문신이 있고, 말투도 퉁명스러웠다. 첫날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점수를 매겼다. ‘불친절하네…’ 그런데 며칠 뒤, 어떤 할머니 손님이 카드가 안 된다며 낑낑대고 있을 때 그 직원이 말했다. “오늘 그냥 가져가요. 내일 오면 돼요.”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본 건 사람의 ‘전체’가 아니라 내 편견을 비춘 ‘단편’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판단한다. 카운터 너머의 몇 초, 엘리베이터 안의 몇 층 사이, SNS의 몇 줄 안에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말한 휴리스틱(heuristics)—빨리 판단하게 돕는 지름길—은 위기 속에서 유용하지만, 사람을 만날 때는 종종 성급한 틀을 만든다. 그래서 타인의 실수는 “그 사람 성격 탓”으로, 내 실수는 “상황 탓”으로 돌리는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 Lee Ross) 도 쉽게 저지른다. 그 틀의 이름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그렇다면 고정관념의 반대는 뭘까? 새로움? 파격? 혁신? 나는 갈수록 확신한다. 고정관념의 반대말은 ‘존중’이라고.
존중은 “동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존중은 판단을 늦추는 시간이고, 사람을 전체로 보려는 태도다.
“저건 좀 아니지”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랐다면, 존중은 잠깐 그 말을 돌려 “왜 그럴까?”라고 묻도록 발걸음을 늦춘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지닌 존재다. 내 뜻과 취향과 신념으로 재단하기 전에, 그 형상이 먼저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관계를 나–그것(I–It), 나–너(I–Thou)로 나누었다. 고정관념은 사람을 ‘그것’으로 만든다. 기능, 스펙, 표지(나이·성별·직업)로 해석한다. 반대로 존중은 사람을 ‘너’로 맞이한다. 내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존재하는 신비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라고 이름 붙이신 그 생명 그대로.
심리학도 함께 보탠다. 클로드 스틸(Claude M. Steele) 이 말한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누군가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찍힌 낙인을 의식할 때, 실제 수행력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여자는 수학을 못 해”라는 그릇된 말이 나중에 시험장에서 실제 점수까지 흔든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꺾을지, 말과 시선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래서 존중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다. 존중의 시선 하나가 어떤 이의 어깨를 펴게 하고, 목소리를 찾게 한다.
앞에서 말한 그 편의점 직원이 어느 날 계산대 뒤에 작은 사진을 붙여놨다. 낡은 슬리퍼를 신은 꼬마와 강아지 사진. “아들이에요?” 물으니 툭 던지듯 “조카요. 제가 키워요.”라고 했다. 그 짧은 문장에 많은 사정이 숨어 있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밤들이, 피곤이 쌓인 눈빛이,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온 긴장감이, 그리고 사랑이. 그날 이후로 나는 일부러 “수고 많으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변한 건 나였다. 그를 ‘그것’으로 보던 눈에서 ‘너’로 보는 눈으로. 놀랍게도 내 하루도 부드러워졌다. 존중은 상대만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덜 차갑게 만든다.
물론, 존중이 모든 걸 ‘좋다’로 덮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명백히 해를 끼친다면, 그 행동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존중은 행동을 무조건 승인하는 태도가 아니라, 존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잘못은 분명히 ‘잘못’이라 말하되, 사람을 잘못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 신앙의 말로 하면, 정죄가 아니라 회개의 길을 열어두는 것. 그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기도 하다(롬 2:4).
그럼 일상에선 어떻게 걸을 수 있을까? 방법을 나열하기보다, 내가 배운 세 가지의 ‘작은 유예’를 적어본다.
첫 번째로, 말을 붙잡는 3초. “저 사람 왜 저래”가 떠오를 때, 그 말을 3초만 붙잡아 본다. 그리고 이렇게 번역한다. “무슨 사연일까?” 그 3초가 사람을 살린다.
두 번째, 이름을 묻는 1 문장. “사장님” “학생” 대신 이름을 부르면, 상대는 ‘그것’에서 ‘너’가 된다.
세 번째로, 짧은 기도 한 줄. “주님, 저의 눈을 먼저 넓혀 주소서.” 판단을 덜고, 자리를 한 뼘 비워두는 기도.
고정관념은 쉽고 빠르다. 존중은 느리고 서툴다. 그래서 존중은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삶이 단단해진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휩쓸리던 마음이 조금씩 길들여지고, 타자를 ‘설명’하려던 욕망이 ‘경청’으로 바뀐다. 신앙은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 길”이라 부를 것이다 - 보이는 표지판보다 보이지 않는 중심을 신뢰하는 길(고후 5:7).
편의점 직원이 급히 나가는 나에게 인사했다. “오늘도 평안하세요.” 익숙한 교회식 인사말이 낯설게 따뜻했다. 아마 그는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날, 속으로 같은 말을 건넸다. “Jason, 당신도 오늘 평안이 있기를.”
고정관념의 반대말은 존중이다.
존중은 상대를 바꾸기 전에 나를 바꾸는 시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늘 지금 여기서 - 내가 만나는 한 사람에게서 -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