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주도 10 - 말 앞에서 내가 선다

by 강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언 18:21)


퇴근길,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조금 지쳐 보였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오늘, 완전 망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어깨가 더 내려앉는 걸 느꼈다. 돌아보면 그날은 사실 ‘망한 하루’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계획이 어긋났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을 뿐. 그런데 언어가 선을 그었다. 말이 먼저 결론을 내리고, 마음과 몸이 그 결론을 따라갔다.

그때 알았다. 생각을 주도하려면, 언어의 고삐부터 내가 쥐어야 한다는 것을.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말의 힘을 연구해 왔다.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와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의 "언어 상대성 이론(linguistic relativity)"은 우리가 가진 언어가 세계를 보는 틀에 영향을 준다고 제안한다(학계 논쟁은 있지만 통찰은 선명하다). 제임스 그로스(James J. Gross)의 "재평가(emotional reappraisal)" 연구는, 사건을 다시 말로 해석할 때 감정의 강도와 방향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W. Pennebaker)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가 상처를 ‘언어’로 붙잡아 둘 때 회복이 촉진된다고 보고했다. 또 아론 벡(Aaron T. Beck)의 인지치료는 “재앙화(catastrophizing)” 같은 왜곡된 말습관을 알아차리고 다른 문장으로 바꾸는 연습에서 출발한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말이 좁으면, 세상도 좁아진다.


신앙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아담에게 피조물의 이름 짓는 책임을 맡기셨다(창세기 2:19). 축복은 결국 선포되는 선이고, 저주는 사람에게 잘못된 이름표를 붙이는 언어다.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고 권한다(에베소서 4:29). 말은 공기처럼 가볍지만, 사실 주권의 도구다.


나는 한동안 이런 연습을 했다.

“망했다” 대신 “변수가 생겼다.”

“너무 바쁘다” 대신 “오늘이 가득하다.”

“또 실수했네” 대신 “오늘 배운 게 있다.”

"죽겠다"는 말 대신 "살겠다"와 같은 말을 하라는 것도 기억난다.

문장을 바꾸자, 마음의 체감 온도가 내려갔다. 같은 사건인데도, 다른 기도가 나왔다. “왜 이래요?”가 아니라 “주님, 이 변수에서 무엇을 보게 하시나요?” - 언어가 바뀌자, 하나님이 가까워졌다.

가정에서도 말의 방향이 삶의 방향이 되곤 한다. 숙제를 하다 막힌 아이에게 “그걸 왜 몰라?”가 아닌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해. 다음 한 칸만 더 가보자”라고 말하면, 아이의 눈빛이 바뀐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말이 열쇠가 되기도, 자물쇠가 되기도 한다. 택배 기사님께 “늦게까지 고생 많으세요” 한마디를 건넸을 때, 그분의 어깨가 잠깐 펴지는 걸 여러 번 보았다. 말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세상을 가볍게 한다.


물론, 언어는 현실을 꾸며내는 주문이 아니다. “아프지 않아”라고 말한다고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은 "주의력(attention)"을 옮겨 놓는다.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말한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처럼, “손실”이라 부르느냐 “투자”라 부르느냐에 따라 같은 수치가 다르게 체감된다. 언어의 프레임을 내가 선택할 때, 생각의 방향을 내가 주도하게 된다.


믿음의 실로 이 말을 다시 꿰어 보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잠언 18:21)에 달렸다는 말씀은, 내 혀가 누군가의 하루를 살릴 수도, 꺾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니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언어의 순간들 - 아침 인사, 메신저 답장, 식탁의 한마디, 운전대 뒤의 혼잣말 - 그 어디서든 주권을 되찾아 보자. 상황이 말을 끌고 다니게 두지 말고, 말이 상황을 길들이도록 맡겨 보자.


밤늦게 작업이 꼬여 마음이 흐트러지던 날, 마지막 문장을 쓰며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충분하다.” 그 말에 힘입어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어제의 문장이 오늘의 나를 불러냈다. 말은 이렇게, 미래의 나를 초대한다.


오늘 당신의 입술에 어떤 단어를 올릴 것인가.

누군가에게 붙일 이름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부를 호칭은 무엇인가.

생각을 주도하고 싶다면, 먼저 말을 선택하자.

작지만 결정적인 그 선택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하나님 앞에서, 나와 이웃을 가볍게 하는 언어 - 그 말 앞에 내가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