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주도 9 - 평범함의 주권

by 강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데살로니가전서 4:11–12)


아침마다 같은 길을 걷는다. 같은 시간의 지하철, 같은 손잡이, 같은 칸. 출근해서는 같은 자리, 같은 머그컵에 물을 끓이고, 같은 서랍에서 티백을 꺼낸다. 예전의 나는 이 “같음”이 나를 잡아끄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 때면, 더 화려한 어딘가에서만 ‘진짜 삶’이 열린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 그릇을 마지막 하나까지 헹구고 나니 문득 가슴이 고요했다. 특별할 것 없는 접시 한 장에, 오늘의 내가 깔끔히 마침표를 찍었다는 느낌. 그 순간 알았다. 평범은 성공의 반대가 아니라 충실함이 쌓이는 자리라는 것을.


심리학자 브릭먼(Philip Brickman)과 캠벨(Donald T. Campbell)은 우리가 좋은 일이 와도 금세 익숙해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헤도닉 트레드밀(hedonic treadmill)”이라 불렀다. 더 자극적인 무언가를 찾아 계속 달리게 만드는 러닝머신. 그 위에서 나는 늘 다른 삶을 상상했지만, 정작 발밑의 걸음에 온 마음을 두지는 못했다.

캐럴 드웩(Carol S. Dweck)은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을 말한다. 결과보다 과정에 머무르려는 마음, 다시 말해 ‘되는 중’의 가치를 보는 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덕을 “습(習, habit)”이라 했다. 한 번의 무용담이 아니라, 같은 동작을 다시 올곧게 하는 손의 기억.


성경이 “조용히 살며, 너의 손으로 일하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눈에 띄지 않는 일상을 살라는 뜻이 아니다. 보이기 위한 삶 대신, 보이지 않는 자리를 단정히 세우는 주권을 회복하라는 초대다. 하나님은 종종 “큰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같은 작은 일을 같은 마음으로 해내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지탱하신다.


나도 한동안 일상을 가벼이 여겼다. 이메일 답장을 미루고, 쓰레기봉투를 내일로 넘기고, ‘대단한 글’을 쓸 시간만 기다렸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다. 내 글의 숨이 가빠질수록, 책상 위 사소함이 엉키기 시작했다. 반대로, “지금 내 앞의 한 사람에게 정성껏 답하기” “오늘의 쓰레기는 오늘 묶기” 같은 작고 선명한 과업에 마음을 실으면, 생각도 길이 열렸다. 평범을 경멸하던 눈이 바뀌자, 같은 가격표가 덜 날카롭게 보이고, 같은 길이 덜 지루하게 느껴졌다. 바뀐 건 세상이 아니라 내가 고른 시선이었다.


평범함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을 주도하라는 말이다. 같은 일을 같은 마음으로 반복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냥’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은근히 연결하는 숨은 다리가 된다. 누군가는 “별거 아냐” 하고 지나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안다. 이 접시 한 장, 이 문장 한 줄, 이 전화 한 통이 누군가의 하루를 가볍게 한다는 것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있었다. 그는 큰 프로젝트의 박수 속에서도 표정이 들뜨지 않았고, 쓸쓸한 퇴근길에도 어깨가 크게 처지지 않았다. 비결을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저는 큰 성취를 ‘축제’로, 작은 일을 ‘예배’로 생각해요. 축제는 가끔이고, 예배는 매일이죠.” 정말 깊은 통찰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해했다. 훌륭함은 종종 조용한 곳에서 길러진다는 것을. 남이 칭찬하는 업적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일관성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평범을 주도하려면 두 가지 시선이 필요했다.

첫째, 비교의 소음을 낮추는 것. 헤도닉 트레드밀(hedonic treadmill)은 “더”의 속삭임으로 우리를 몰아세운다. 그럴 때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춘다. “오늘만 잘하자.” 내 앞의 한 사람, 한 업무, 한 기도 제목에 마음을 얹는다.

둘째, 의미의 언어를 붙이는 것. ‘잡무’라 부르던 일을 ‘사람을 살리는 루틴(routine)’으로, ‘반복’이라 하던 시간을 ‘습관이 되는 사랑(habitual love)’으로 부른다. 언어를 바꾸면 마음이 따라온다. 마음이 따라오면 손이 달라진다.


믿음의 언어로 말하자. 하나님은 “작은 시작(small beginnings)”을 멸시하지 않으신다(스가랴 4:10).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기고(마태복음 17:20), 과부의 두 렙돈(two mites)이 하늘나라 회계에 기록된다(마가복음 12:41–44). 내가 꾸준히 다지는 보통의 길을 통해, 하나님은 이웃의 숨을 고르게 하신다. 그러니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내 손으로 차를 데우고, 내 글을 다듬고, 내 아이의 도시락을 싼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평범이 있다. 그 평범을 사랑하고, 그 평범을 주도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밤이 깊어 퇴근길 차창에 내 얼굴이 비친다. 특별한 하루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 잔잔한 확신이 올라온다. ‘오늘의 평범함을 잘 살았구나.’ 내일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길이지만, 어제와 같은 내가 아니다. 같은 일을 같은 마음으로 다시 올려드리며, 평범함의 주권을 조금 더 단단히 쥐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