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주도 8 - 작고 위대한 일

by 강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


몇 해 전 여름, 땡볕 아래 고속도로 휴게소.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모금함 옆에서 목청껏 외쳤다. “여러분의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립니다!” 땀에 젖은 앞머리, 그러나 표정은 맑았다. 나는 그 모금이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보다 이 더운 날 바람맞으며 서 있는 마음에 먼저 마음이 움직였다. 지갑을 열고 모금에 동참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 편의점에서 쭈쭈바 여덟 개를 사서, 그들의 책상 위에 툭. 당황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고작 몇천 원. 그런데 내 마음은 한여름 소나기처럼 시원해졌다.


돌아서며 잠깐 망설였다. ‘이런 얘기를 굳이 이렇게 글로 써도 될까? 잘난 척처럼 보이면?’
예수님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 하셨다. 동시에 성경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도 말한다. 그날 내가 배운 건 이것이었다. 작은 선은 전염된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이런 순간을 ‘도덕적 고양(moral elevation)’이라 부른다. 한 사람의 선이 옆 사람의 마음을 들어 올리는 현상. 휴게소의 그 아이스크림은 내 안의 불씨를 키웠고, 옆 사람의 용기를 깨웠다.


그 후로 눈에 더 잘 들어오기 시작한 장면들이 있다.
아침마다 경비실에 들러 “오늘도 평안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이웃, 우산 하나 더 챙겨 다니며 비 오는 날 낯선 손에 쥐어주는 동네 어르신, 카트 정리를 “내 일처럼” 해놓고 조용히 떠나는 젊은 부부…. 이름도 표지도 없는 작은 손짓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동네까지 끌어오는 통로가 된다. 주님은 “냉수 한 그릇”을 기억하신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은 크기나 화제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당장 건넬 수 있는 선이다.


물론 마음을 무디게 만드는 소리도 있다.
“그렇게 해서 뭐가 바뀌나?” “세상은 거대한 문제로 가득한데.”
그럴 때 나는 씨 한 알을 떠올린다. 겨자씨는 손끝에 묻을 정도로 작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들이 깃들 나무가 된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그리스도교 사상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이것을 "창조적 충실함"이라고 불렀다. 거대한 결과를 통제하려 들지 않고, 맡겨진 작은 것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태도(“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 눅 16:10). 심리학 쪽에서도 비슷한 관찰이 있다. 선행은 ‘사회적 전염’처럼 퍼진다. 한 번의 친절이 세 사람쯤을 건너 파급효과를 만든다는 연구들이 이어진다. 계산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파장 하나를 더 보태면 된다.


작은 선이 왜 우리의 자존감도 살려낼까?
누군가에게 ‘주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비교의 링 위에 서 있지 않게 된다. 점수와 순위 대신 관대함이 나를 정의한다. 나라는 사람의 ‘이름표’가 새로 붙는다. 믿음의 언어로 말하면, “받은 사랑이 흐르는 방향”이 나의 정체성을 다시 만든다.

방법을 나열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해보며 좋았던 몇 가지 ‘작은 습관’을 남겨 본다. 권고가 아니라 초대로 받아 주면 좋겠다.

- 하루 한 사람, 이름 부르기. “00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이름을 불러 주면 마음의 거리가 확 줄어든다.

- 손에 쥐고 다니는 ‘냉수 한 그릇’. 작은 비타민 음료, 여분의 우산, 포스트잇 카드. “당신 덕분에 하루가 쉬워졌어요”라는 메모 한 줄이면 충분하다.

- 아이와 함께 하는 ‘작은 헌금’. 길가 쓰레기 딱 하나 줍기, 엘리베이터 문 3초 더 잡아 주기 같은 ‘가정 전통’을 만들어 본다. 신앙은 이야기로 배우고, 습관으로 남는다.


그날 휴게소의 “감사합니다!”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사실 상을 받은 건 내 쪽이었다.
오늘도 묻는다. 지금, 여기서 내가 건넬 수 있는 ‘한 그릇의 냉수’는 무엇일까?
크지 않아도 된다. 작아도 충분히,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