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주도 7 - 하는 일에 의미 부여하기

by 강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23)


살면서 참 여러 일을 거쳤다. 벽돌 나르고, 구두 닦고(찍새로 시작해서 한동안은 직접 손으로 광을 냈다), 대리운전하고, 신문, 우유를 새벽에 돌리고, 택배 상, 하차에 땀을 쏟고, 술집, 카페 서빙도 했다. 한때는 떡볶이 가게로 프랜차이즈의 꿈을 꾸다가 보기 좋게 넘어졌고, 음악 쪽에선 프로듀서라는 이름을 걸고 사람들과 여러 음악작업을 했다.


돌이켜보면 “가치 있는 일”“덜 가치 있는 일”의 기준은 일 자체에 있지 않았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을 어떻게 의미 붙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하루가 됐다.

구두 닦을 땐 늘 손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남의 신발 속에 손을 집어넣고 구두약을 맨손으로 덥석 묻히는 일이라면 그럴 수밖에. 그런데 어느 날,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나가며 표정이 환해지는 손님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저 사람의 첫 미팅이 잘 풀리면, 내 손끝에도 작은 몫이 있겠지.’ 그날부턴 상자 위에 앉아 있는 시간이 단순 노동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빛나게 돕는 일이 됐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허투루 놀던 습관도 접었다. 당구대에 손 올리기가 민망해서였다. 묘하게, 그 절제가 내 자존을 세웠다.


대리운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취한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 겉으론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론 한 가정의 밤을 안전하게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술집, 카페 서빙은 내 시간과 미소를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돕는 일, 새벽 신문과 우유는 한 집의 정보와 건강을 제때 놓치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신호대기 중에 본 승합차 뒷유리의 문구가 아직도 기억난다. “시원하게 뻥 뚫어드립니다.” 하수관을 뚫는다는 건 대체로 그 누구도 미래의 꿈이나 희망 직업 리스트엔 올리지는 않지만, 그분의 손길이 없으면 우리의 일상은 금방 막힌다. 도시를 새벽마다 쓸어내는 분들 덕에 우리는 “깨끗함”을 공기처럼 누린다. 이름이 불리지 않아도, 세상은 그런 숨은 손길로 굴러간다.


심리학자 에이미 브제스니프스키(Amy Wrzesniewski)와 제인 더튼(Jane E. Dutton)은 이걸 “잡 크래프팅(job crafting)”이라고 불렀다. 업무의 경계와 관계, 일의 의미를 스스로 재구성할 때 일은 ‘직업’에서 ‘소명’으로 이동한다.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도 말했다. “우리는 상황을 늘 바꿀 수 없지만,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믿음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사람에게 하듯이”가 아니라 “주께 하듯이” 일할 때, 평범한 작업이 예배가 된다.


의미를 붙인다고 모든 일이 갑자기 로맨틱해지는 건 아니다. 손이 터지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고객이 불친절할 때가 분명 있다. 그래도 관점을 조금만 틀면 다르게 보인다. 벽돌을 나를 때 ‘노가다’라고 중얼거리던 날엔 하루가 길었고, ‘건물이 세워지는 데 내 한 장 벽돌이 보탬이 된다’고 속으로 말하던 날엔 어깨가 달라졌다. 실패한 떡볶이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장부만 보면 참담했지만, 그 시절 내게 배달된 건 손실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배우는 법, 접시를 닦는 속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체력,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들이다.


결국, 내 일이 거룩해지는 순간은 누군가가 값 매겨줄 때가 아니라, 내가 그 일 안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다. “주님, 오늘 제 손이 닿는 이 작은 일에도 의미를 입혀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 같은 작업대가 다른 제단이 된다. 누군가는 미용실 언니라 부를지 몰라도, 그분은 사람을 빛나게 하는 예술가다. 누군가는 청소 아저씨라 부르겠지만, 그분은 도시의 새벽을 여는 관리자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가 선 자리에서, 나만이 줄 수 있는 선을 한 줄 더 긋는다.


하루의 끝, 집에 돌아와 손을 씻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내가 한 일에, 내가 의미를 덧입혔는가?”
대답이 “그렇다”라면, 결과가 어떻든 그날은 이미 충분히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