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1 - 교육이 필요한 이유

by 강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


한동안 나는 내 안에 천재가 산다고 믿었다. 머릿속에서는 멜로디가 떠오르고 오케스트라가 울린다. 여러 장면과 대사가 영화처럼 흘렀다. 문제는 그 음악과 장면이 종이에 내려앉는 순간 고꾸라진다는 것이었다. 소리는 들리는데 화성은 모르겠고, 이야기는 떠오르는데 구조를 못 세웠다. 그러다 어느 날 알았다. 내게 부족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길이었다. 상상에서 현실로 건너가려면, 그 사이에는 늘 교육과 훈련이라는 다리가 놓여야 한다.


성경은 은혜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형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흙에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을 “다스리라”고 맡기셨다. 은혜는 시작이고, 훈련은 지속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지혜가 자라”갔다. 그러니 배움이 필요한 나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자람은 신앙의 언어다.


교육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을 능력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좋은 음악을 사랑한다고 음악가가 되지 않고, 성경을 사랑한다고 저절로 해석이 깊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불씨다. 불씨가 난로가 되려면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고 밤새 지켜야 한다. 여기서 교육은 장작이고, 훈련은 풀무다. 신앙도 그렇다. 은혜로 불붙지만, 말씀과 기도로 길러지지 않으면 금세 꺼진다. 아침마다 시편을 한 장이라도 소리 내어 읽고, 한 구절이라도 외우는 꾸준함이 영혼의 근육을 만든다.


두 번째 이유는 직감의 토대를 튼튼히 하려면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K. 앤더스 에릭슨(K. Anders Ericsson)은 ‘의도적 연습(deliberate practice)’을 말한다. 그냥 오래 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분명하고 피드백이 있는 반복이 쌓일 때 직감이 생긴다. 멋진 즉흥연주 뒤에는 지루한 스케일연습이 있고, 간결한 문장 뒤에는 수십 번의 퇴고가 있다. 영적 분별도 다르지 않다. 성령의 미세한 속삭임을 구분하려면, 성경의 큰 목소리를 오래 듣는 습관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 반복은 영혼의 귀를 만든다.


세 번째 이유는 믿음이 이해를 밀고, 이해가 믿음을 넓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는 “믿으니 알게 된다(Credo ut intelligam)”고 했다. 신앙은 생각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믿기 때문에 더 묻고, 더 배운다. 기도는 감정의 분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공부다. 설교 한 편을 듣고 감동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본문을 스스로 읽고, 주석을 찾아보고, 삶에 어떻게 옮길지 써보는 그 한 걸음이 믿음을 깊이로 끌고 간다. 믿음이 머무르지 않고 형성이 될 때, 우리는 단단해진다.


피아노를 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교회에서 반주를 맡아 처음으로 찬송가를 편곡해 본 적이 있다. 머릿속에서는 줄줄 흘렀는데, 실제 악보 앞에서는 손이 멈췄다. 그날 밤 나는 화성학 책을 펼쳤다. 코드의 기능, 진행 금기, 보이싱의 균형. 지루하고 딱딱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다음 주일에 같은 곡을 다시 편곡했을 때, 두 마디가 조금 더 고와졌다. 바뀐 것은 실력이 아니라 태도였다. 나는 감정을 끓이는 사람이 아니라, 형태를 빚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뒤로 작은 익힘을 쌓을 때마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하신 말씀 한 줄이 떠올랐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름다움은 우연이 아니라 공들임이다.


교육은 거창한 학위가 아니라 작은 순종의 누적이다. 심리학은 그것을 “습관의 관성“이라 부르고, 철학자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덕을 “연습(practice) 안에서 자라는 내적 선“이라고 했다. 신앙의 말로 바꾸면, 제자는 ‘훈련(discipline)’을 통해 스승을 닮는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기도 시간을 정하고, 성경 읽기를 지루할 만큼 반복하고, 감사 일기를 쓰고, 누군가에게 배운 것을 나누는 그 단순한 인내가 나를 새 사람으로 빚는다.


아이가 타자 연습을 하다 금세 게임 오버가 된다. “아빠는 왜 이렇게 빨라?”라고 묻는다. 나는 멋진 동기부여 문장을 찾지 않는다. 그저 사실을 말한다. “손가락 자리를 수없이 익혔거든.” 신앙도 달라지지 않는다. 수련 없이 변화는 없다. 말씀을 조금 읽으면 조금 변하고, 꾸준히 읽으면 꾸준히 변한다. 교육은 기적을 대신하지 않지만, 기적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서다. 사랑은 불꽃처럼 시작되어도, 벽난로처럼 이어져야 한다. 결혼을 지키는 것도, 소명을 지키는 것도, 은혜를 지키는 것도 결국은 평범한 연습의 힘에서 나온다. 하루 10분의 묵상, 일주일 한 번의 금식, 한 달 한 번의 조용한 리트릿. 이런 사소한 시간표가 영혼의 근력을 만든다. 신앙은 감정의 높낮이가 아니라 방향의 지속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내 안의 천재는 은사고, 내 손의 서투름은 숙제다. 은사는 선물이고, 숙제는 책임이다. 선물은 감사로 받고, 책임은 배움으로 갚는다. 오늘도 책을 펼치고, 스승을 찾아가고, 작은 과제를 한다. 느리지만, 자란다. 예수님도 지혜가 자라 가셨다면, 나는 더 배워야 한다. 배움은 나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고, 이웃 앞에서 유익하게 만든다.


끝으로 내 마음에 붙잡히는 한 줄. 공부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내가 사랑을 더 잘하게 돕는다. 그래서 오늘도 배운다. 하나님 나라의 기술을. 삶을 빚는 길을. 그리고 언젠가, 아주 작은 진보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보시기에 조금은, 좋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