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 10 - 힘의 정의 다시 쓰기

by 강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태복음 20:26–28)


아이에게 “힘이 뭐라고 생각해?” 하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이기는 거.” 나도 한때 그랬다.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크게 소리치는 사람, 더 빨리 결정하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경쟁에서 이기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행복이 따라온다고 세상에선 배웠으니까. 그런데 신앙 안에서 오래 걸어올수록, 또 삶의 굴곡을 몇 번 통과할수록, 그 정의는 조금씩 어긋났다. 힘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드러나고, 정복이 아니라 돌봄에서 커진다. 성경은 그걸 “섬김”이라고 불렀다.


회사에서 인생 최악의 대표를 만났던 적이 있다. 회의 때마다 목소리가 가장 컸고, 결재 도장은 가장 빨랐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늘 뒤에서 일정을 정리하던 과장 한 명을 사람들은 찾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메시지가 몰렸다. 그는 지시하지 않았고, 공을 독차지하지도 않았다. 대신 필요한 것을 먼저 보고 채워줬다. ‘힘’이 있는 사람은 대표인데, ‘영향력’은 늘 과장에게로 흘렀다. 그때 알았다. 힘은 직함으로 약속되는 보증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남아 있는 흔적이라는 걸.


예수님의 길은 그 흔적을 더 깊이 뒤집는다. 예수님은 권세를 내려놓는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이 아니라, 아래에서 받쳐 올리는 힘. 빌립보서는 그걸 “자기를 비워(kenosis)“ 낮아진 사랑이라 부른다. 반짝이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 사람들은 안전을 느끼고 마음을 연다. 그래서 섬김은 감상적인 미덕이 아니라, 공동체를 움직이는 가장 현실적인 동력이다.


심리학도 엇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회심리학자 대쳐 켈트너(Dacher Keltner)는 ‘권력의 역설(power paradox)’을 연구하며, 실제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힘은 공감, 배려, 공정함 같은 관계적 자질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권력을 쥔 뒤에는 그 자질이 쉽게 마모된다는 사실이다. 올라갈 때 얻었던 덕목을, 올라간 뒤에 잃어버리면 힘은 오래가지 못한다. ‘섬김’은 그 마모를 막는 일종의 윤활유다. 내가 중심에 서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다른 이들이 다시 내 곁으로 모인다.


철학에서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폭력은 힘의 대체물이 될 수 있지만, 힘 그 자체는 ‘함께 행동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했다. 혼자 휘두르는 권위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 신앙의 언어로 옮기면 교회가 몸으로, 성도가 지체로 묶여 있을 때 흘러나오는 권능이다. 그래서 참된 힘은 군림이 아니라 조율이고, 독점이 아니라 분배다.


이 정의를 일상으로 가져오면 풍경이 바뀐다. 집안에서 ‘가장의 권위’는 결정권이 아니라 배려권이 되고, 직장에서 ‘리더십’은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보다 먼저 손을 걷어붙이는 팔뚝이 된다. 예배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찬양팀의 힘은 테크닉이 아니라, 뒷자리의 한 영혼이 편안히 숨 쉬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태도에서 나온다. 힘은 “내가 얼마나 보이는가”가 아니라 “네가 얼마나 편해지는가”로 측정된다.


나 역시 몇 번 배웠다. 아이가 잠든 밤,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아무도 박수치지 않는다. 그러나 주방의 조용한 싱크대 앞에서 마음은 희한하게 가벼워진다. 그 작은 섬김이 가족의 내일을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든다는 걸 안다. 교회 주차 봉사도 그랬다. 눈에 띄지 않는 시간, 고개 숙여 인사하고 차량을 유도하는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감각을 비로소 벗었다. 힘은 위가 아니라 사이에 있었다.


물론 현실은 단단하다. 경쟁해야 하고,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섬김’이 때로는 손해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많다. 여기서 신앙이 다시 말을 건넨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표에서 힘은 결과가 아니라 방식으로 평가된다. “크고자 하면 섬겨라”는 명령은 손해 보라는 협박이 아니라, 네가 정말 크고 싶다면 그 길이 여기에 있다는 초대다. 섬김은 당장의 효율을 희생하는 길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뢰를 축적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신뢰는 언젠가 반드시 힘으로 환산된다.


서비스 리더십을 말한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는 리더의 성패를 이렇게 가늠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섬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졌는가, 더 건강해졌는가, 또 다른 이를 섬길 ‘의지’가 생겼는가.” 이 질문은 의외로 엄격하다. 내 리더십이 내 이름을 빛냈는지가 아니라, 네 삶에 실제 변화를 만들어 냈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좋은 신호다. 힘을 다시 쓰는 연습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니까.


교회는 이 연습을 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다. 주일에만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힘을 나누는 습관’을 배우는 공간. 회의에서 내 의견이 옳을 때도 한 발 물러서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는 훈련, 봉사 명단의 빈칸을 보고 “이번엔 내가 채우자” 하고 조용히 이름을 올리는 훈련, 책임을 나눠 주고 결과를 믿고 기다리는 훈련. 그 반복 속에서 힘은 소음이 아니라 음악이 된다. 각 악기가 자기 볼륨을 줄일수록 합주는 더 깊어진다.


여기까지 써놓고, 결국 다시 묻게 된다. “그럼 내 힘은 어디서 오나?” 신앙의 대답은 한결같다. 위에서, 그러나 ‘위에서’로만 끝나지 않고 이웃을 향해 흘러가는 곳에서.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내 힘은 소모되지 않고 재충전된다. 분주한 하루 속에서도 짧은 기도로 호흡을 맞추는 습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는 시간만큼, 사람들 앞에서는 넓어질 수 있다. 작아짐이 약함이 아니라 여백이 될 때, 그 여백으로 누군가가 쉰다. 그게 힘이다.


오늘도 크고 싶다면, 먼저 낮아지자. 높아지고 싶다면, 먼저 받쳐 올리자.

“힘의 정의를 다시 쓰는” 작은 결심 하나가, 내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이다. 우리는 안다. 주님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