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4 - 상처는 나이 먹지 않는다

by 강훈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편 147:3)


몸은 자란다. 생각도 자란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이상하다. 한 사건이 칼처럼 스쳐 간 그날의 크기와 모양 그대로, 시간 속에 멈춰 선다. 오해 한 줄이 해명되지 못한 채 굳어지면, 내 안에는 그때 그 나이의 아이가 눕는다. 달래 주면 잠깐 조용해지지만, 금세 다시 바닥을 구른다. 상처는 저절로 성숙하지 않는다. 내가 데리고 자라야 한다.


여기서 “치유(healing)”를 오해하기 쉽다.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שָׁלוֹם, shalom)”은 고통이 한 방에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찢긴 것들이 다시 맞물리는 전체성을 말한다. 치유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에서 쓰이는 말 라파(רָפָא, rapha) 역시 없애기보다 싸매기에 가깝다. 그러니 신앙의 치유는 기억을 지우거나 과거를 삭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억이 내 안에서 차지하던 자리를 바꾸는 일이다. 상처의 존재가 사라지진 않지만, 주인의 자리를 빼앗기 시작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상처를 숨기지 않으셨다.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못자국을 보라”(요 20:27)고 하셨다. 못자국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는 피 흘리지 않았다. 지워진 흔적이 아니라, 변환된 흔적. 신학자 헨리 나누웬(Henri Nouwen)은 그래서 인간을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 부른다. 하나님이 만지시면 상처는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 타인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


심리학도 비슷한 말을 한다. 신경과학자 카림 나더(Karim Nader)는 기억이 꺼내질 때마다 재통합(memory reconsolidation)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같은 사건도 어떤 맥락에서 다시 마주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저장된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고통의 기억을 하나님과 함께 다시 읽을 때 기억의 감도와 지배력이 달라진다. 시편의 탄식이 그래서 필요하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편)는 신앙이 모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석권을 다시 여는 기도다. 눈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그 시간이, 과거의 고정된 프레임을 조금씩 늦춘다.


상처를 미워할수록 상처는 더 오래 머문다. 몸의 상처를 예로 들어 보자. 손을 다치면 우리는 자르지 않고 씻고, 소독하고, 싸맨다. 흉터가 남아도 손은 여전히 내 손이다. 마음의 상처도 그렇다. 부끄러워 숨기면 곪는다. 인정하고 돌보면 흉터가 된다. 흉터는 민감하지만, 더는 나를 통치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세 번이나 옮겨 달라 기도했지만,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고 응답하셨다.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으나, 의미가 교체되었다. 약함은 수치가 아니라 은혜가 머무는 자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화려한 비법은 없다. 대신 믿음의 느린 동작이 있다.

하나. 상처를 이름으로 부른다. “그날의 그 말 때문에 나는 작아졌다.” 고백은 상처를 사실의 자리로 옮긴다.

둘. 그 이름을 하나님께 건넨다. “주여, 이 해석을 주께 맡깁니다.” 맡김은 포기가 아니라 주권 교환이다.

셋. 신뢰할 수 있는 한 사람 앞에 빛으로 꺼낸다. 어둠에서 자라는 것은 어둠으로 죽는다.(야고보서 5:16)

넷. 오늘의 작은 선을 반대 방향으로 심는다. 상처가 나를 닫게 했다면, 아주 작은 친절 하나로 열어 본다. 행동은 마음의 지도를 바꾼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인간을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 불렀다. 우리는 사건들의 합이 아니라, 사건들을 어떻게 엮어 말하는가의 합이다. 복음은 이 서사의 중심을 바꾼다. “나는 상처 입은 자”에서 “나는 상처 입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로. 이 전환이 일어날 때, 상처는 여전히 내 안에 있으되 내가 상처 안에 있지는 않게 된다.


시간은 상처를 혼자 키워 주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보낸 시간이 상처를 다르게 만들 뿐이다. 오늘 밤, 잠들기 전 3분을 내어 조용히 손을 펼쳐 본다. 마음의 오래된 자국들을 훑어보며 이렇게 속삭인다.

“주님, 이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주의 손 안에서 모양이 바뀌게 하소서.”

그러면 안다. 상처는 나이 먹지 않지만, 나는 자란다. 그리고 자란 내가 상처를 안고, 타인의 상처를 감쌀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진짜 샬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