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3 - 상처는 누가 주는 게 아니다

by 강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상처받았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문장 속 주어는 늘 ‘나’지만, 동사는 수동태다. 누군가가 던진 말, 표정, 메시지가 내 안으로 곧장 들어와 상처라는 물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을 수신함이 아니라 관리의 자리로 부른다. 마음은 세상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공용 창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경작지다. 문을 여닫는 권한이 내게 있다.


오해하지 말자. 잘못된 말과 행동은 실제로 존재한다. 모욕, 멸시, 가스라이팅, 폭력은 죄다. 예수님도 “형제를 향해 미련하다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 글의 요지는 “가해는 없다”가 아니다. 핵심은 여기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의 최종 버튼은 여전히 내 손에 있다는 것. 나를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그 말이 내 안에서 ‘상처’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에는 언제나 나의 해석이 개입되어 있다.


심리학자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의 말처럼 감정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평가(appraisal)에서 솟아난다. 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날은 웃어넘기고, 어떤 날은 잠을 설친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그 말을 어디에 두었는가가 다르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돌멩이도 손에 들면 무기, 땅에 놓으면 디딤돌이 된다. 내 마음은 그 돌을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장소다.


신앙은 이 결정을 하나님 앞에 다시 돌려드리는 연습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가리켜 “욕을 당하시되 대신 갚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고 증언한다. 예수님은 모욕을 받지 않으려 애쓴 것이 아니라, 모욕의 최종 해석권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문장을 선택하실 수 있었다. 신앙의 성숙은 상처를 전혀 느끼지 않는 강철이 되는 게 아니라, 느낀 것을 하나님께로 옮겨 맡기는 기술이 자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짧은 기도로 나를 붙든다.
“주님, 누군가 한 말의 주인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내 마음의 청지기입니다. 누군가 했던 말의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내 마음의 문단속은 제가 하겠습니다.”


불교의 짧은 일화 하나가 이런 태도를 직설적으로 보여 준다. 누군가가 부처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부처는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 욕은 당신의 것”이라 답했다. 다른 종교지만, 교훈은 선명하다. 받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이 자유는 내 의지의 근육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 자라난다. 절제는 억눌러 터지는 덮개가 아니라, 문을 때에 맞게 열고 닫는 지혜다.


그렇다고 침묵만이 믿음은 아니다. 오해가 생겼다면 진실을 말할 용기도 사랑의 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7)고 하셨다. 내 의도가 곡해되어 관계가 어그러질 때, 우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 내 뜻은 이랬어요. 당신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상대가 상처의 해석을 고집한다면,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몫이다. 내 마음을 지키기도 벅찬데, 타인의 마음을 통제하려 드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일이다.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의견”이라 했다. 그 문장을 그대로 믿음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다. 사건은 하나님께 속하고, 의견은 회개의 자리에 속한다. “주님, 제가 성급히 붙잡은 해석을 내려놓습니다. 주의 진리로 제 마음을 다스려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며 정직하게 경계를 세우자. 폭력은 용납하지 않고, 관계는 가능하면 회복하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의 문은 내가 지키는 것, 그게 복음이 가르치는 균형이다.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능력”이라 했지만, 신앙은 한 줄을 더 적는다. 다시 일으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난다. 그래서 회복탄력성은 단지 성격의 강도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에서 자란다. 하나님이 내게 뭐라 하시는가가 사람의 말보다 크게 들릴수록, 사람의 말은 내 안에서 덜 자란다.

상처는 누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머물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어떤 것이 머물 것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복음이 쥐고 있다.


나의 회복탄력성은 어떤가.
오늘 나는 무엇을 받지 않고, 무엇을 맡기며, 무엇을 사랑으로 말할 것인가.
그 선택이 내일의 마음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