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2 - 절망의 의미

by 강훈

“우리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나 낙심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8–9)


절망. 글자 그대로라면 바라는 것이 끊어지는 마음이다. 손에 쥐고 있던 기대의 실을 가위로 딱 잘라 버리는 행위. 현실이 아니라 해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사업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몸 안에 악한 소식이 들어와도, 그 사실만으로 절망이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절망은 “이제 끝이다”라는 판정을 내가 내릴 때 온다. 바깥의 폭풍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끝”이라는 도장을 찍는 것이다.


성경은 이 ‘판정’을 도려낸다. 바울은 “사방으로 환난”을 인정한다. 그러나 곧바로 말한다. “낙심하지 아니한다.” 같은 현실, 다른 결론. 신앙의 힘은 현실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현실과 결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하나님께 다시 맡기는 데 있다. 내가 내린 최종 판정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행위, 그게 믿음이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수용소에서 배운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 무엇도 인간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자유가 하나 남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 심리학의 언어로 말한 해석의 자유는 신앙의 언어로 소망의 자유다. 소망은 상황이 허락해야만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붙드는 의지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시편 기자가 자기 마음을 향해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내 마음은 종종 현실에 끌려가지만, 영혼은 말씀으로 마음을 이끈다.


절망의 핵심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은 내 존재의 붕괴가 아니다. 의미의 붕괴다. 그래서 절망의 반대는 ‘낙관’이 아니라 ‘의미’다.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설명 방식(explanatory style)이라고 했다. “항상, 모든 것, 내 탓”으로 설명할 때 무력감이 자란다. 성경은 이 설명 방식을 바꾼다. 항상은 하나님께만 해당하고, 모든 것은 그분의 섭리 안에 놓이며, 내 탓은 회개로 맡기되 정죄로 붙들어 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물론 눈물은 필요하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요 11:35). 신앙은 “괜찮다”를 강요하는 긍정이 아니다. 오히려 애가(哀歌)의 전통을 회복한다. 예레미야 애가 3장은 절망의 바닥에서 시작해 이렇게 선회한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오히려 소망이 생겼도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절망의 문장 사이에 하나님의 성품을 끼워 넣는 것, 그게 성도의 전환이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문장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걸음이 바뀐다.


나는 절망의 밤을 지날 때 작은 의식을 하나 붙든다. 아주 간단하다. 침대 머리맡에 종이 한 장을 두고, 하루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쓴다. “오늘 무너진 것 vs 오늘 지켜진 것.” 왼쪽에는 실패, 상실, 미해결을 정직하게 적고, 오른쪽에는 아주 사소한 보존들 - 호흡, 식사 한 끼, 도와준 손길, 말씀 한 구절, 끝내 나를 붙들어 준 기도 - 을 적는다. 완전한 파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 마음은 ‘절대적 실패’의 해석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프랭클의 말처럼 의미는 주어지기보다 발견된다. 그 발견의 자리는 늘 작은 기록과 짧은 기도에 가깝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고통을 “영혼을 하늘의 무게에 맞추는 중력”이라 표현했다. 믿음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고통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무게 중심을 옮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절망이 나를 아래로 끌어내릴 때, 기도는 그 무게를 하나님의 품으로 옮기는 동작이다. “주여, 저의 결론을 거두시고, 주님의 결론을 제게 주옵소서.” 이 한 줄이 절망의 구조를 바꾼다. 절망은 더 이상 끝이 아니라 대기실이 된다. 대기실에서 하는 일은 하나, 기다림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31).


혹시 지금 ‘소망이 끊어져 버린 마음’ 한가운데에 있다면, 스스로를 정죄하지 말라. 절망은 불신앙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성의 증거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 이유도 없다. 하나님은 끊어진 마음의 자리를 연결의 자리로 바꾸시는 분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느끼지만, 그분은 “네가 내게로 돌아왔다”고 말씀하신다. 절망의 한자는 절(絶)과 망(望)이지만, 복음의 단어는 연결(連)과 소망(希望)이다. 끊어진 데를 잇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니 오늘은 거창한 결심 대신 이렇게만 해 보자. 아침에 시편 한 절을 소리 내어 읽고, 낮에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님, 여전히 여기 계시죠?”를 속삭이고, 밤에 한 줄의 감사를 적는다. 절망은 해석의 무너짐이었고, 소망은 관계의 회복이다. 관계가 회복되면 해석이 천천히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바울과 같은 문장을 입에 올린다.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나, 낙심하지 않는다.”

끝이 아니었다. 하나님에게는 아직 문장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