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8 - 수치, 이름을 바꿔 부르는 법

by 강훈

“그를 앙망하는 자는 광채를 내리니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5)


셔츠에 커피 얼룩이 번진 날, 아무도 보지 않았는데 볼이 먼저 달아오른다. 엘리베이터 거울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짜증과 함께 숨이 막힌다. 누군가의 조롱이 아니라 내 시선이 날 움츠리게 한다. 수치는 그렇게 조용히 찾아온다. 사건보다 먼저, 판단보다 깊게.


성경은 수치를 씻어 내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아담과 하와의 무화과 잎,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고개 숙임, 그리고 부활의 새 아침에 “두려워 말라”는 첫인사.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되, 수치를 거두어 사람을 다시 일으키신다. 하나님 앞에서 수치는 결격 사유가 아니라 초대다. 얼굴을 가리는 본능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는 은혜로의 초대말이다.


심리학자 준 프라이스 탱니(June Price Tangney)는 수치(shame)와 죄책감(guilt)을 구분했다. 수치는 “나는 형편없다”처럼 나 전체를 깎아내릴 때 커지고, 회피와 분노를 낳는다. 죄책감은 “내가 그 말을 잘못했다”처럼 행동을 겨냥할 때, 사과와 수정을 낳는다. 신앙의 언어로 옮기면 간단하다. “나는 더럽다”가 아니라 “내가 더럽혔다”라고 말할 때, 회개의 문이 열린다. 하나님은 존재를 단죄하지 않고, 행동을 돌이키게 하신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감정을 ‘가치 판단’으로 보았다.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가 감정의 결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수치의 뿌리는 대개 엉켜 있는 가치다. 사람 앞의 체면이 하나님 앞의 체면을 가려 버릴 때, 작은 흠집도 나를 무너뜨린다. 반대로 가치의 중심을 하나님께 돌리면, 상처 난 자존이 아니라 존귀하게 부르시는 목소리가 먼저 들린다.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이 한 문장이 수치의 방향을 바꾼다.


수치는 없애는 감정이 아니다. 이름을 바꿔 부를 감정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이름에서 ‘나는 그 일을 했던 사람’으로,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고쳐 가는 사람’으로. 시편의 시인들이 했던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한 줄의 “그러나”로 돌아선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렇게 하나님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때, 수치는 방 안의 곰팡이처럼 빛 앞에서 마른다.


나는 이 루틴을 자주 잊는다. 거절 메일 하나에도 어깨가 떨어지고, 오래된 실수의 그림자가 갑자기 커진다. 그럴 때, 짧은 기도로 숨을 고르는 루틴. “주님, ‘내 존재가 잘못이다’가 아니라 ‘내가 행동을 잘못했다’고 여기게 하소서.” 그러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사과를 위한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 다시 시작하는 작은 습관. 탱니가 말한 것처럼, 수치가 죄책감으로 변할 때 회복의 행동이 따라온다. 신앙은 그 행동을 은혜의 호흡으로 바꾼다. 내가 나를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시 회복으로 부르신다. 맞다. 부르신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수치를 ‘타인의 시선이 나를 대상화할 때’의 감각이라 했다. 맞다. 그러나 신앙은 거기서 한 걸음 더 간다. 하나님의 시선이 나를 주체로 되돌린다. 남의 눈에 갇힌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 그래서 복음은 수치의 반대말이 ‘뻔뻔함’이 아니라 '담대함'(히브리서 4:16)임을 가르친다.


오늘도 내 인생에 얼룩이 묻을 수 있다. 말이 삐딱하고, 마음이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때 수치에 지지 말고, 수치의 이름을 바꿔 부르자. “나는 형편없다” 대신 “나는 사랑받는 자다. 그리고 잘못은 다시 바로 잡으면 된다.” 얼굴을 들고, 빛 쪽으로 한 걸음. 시편의 약속처럼, 주님을 앙망하면 그 얼굴은 다시 광채를 얻는다. 수치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