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일상 4. 야망의 정화

by 강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야망은 나쁘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다. 다만 방향을 잃으면 나를 태우고, 정화되면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문제는 크기가 아니라 중심의 속성이다. 소명과 붙어 있으면 힘이 되고, 자기 확증과 붙어 있으면 짐이 된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야망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정화의 대상이다.


정화는 비움에서 시작한다. 비움은 포기가 아니다. 더 큰 것을 담기 위한 공간 만들기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 앞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 힘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목적의 순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놓을 때 사랑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의 주인을 바꾼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물러섰다. 왕권을 당겨 오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절제가 진짜 왕의 품격을 만들었다. 성경의 비움은 언제나 소멸이 아니라 확대로 귀결된다.


심리학도 그 길을 거들어 준다. 동기 연구자 아이엘렛 피시바흐(Ayelet Fishbach)와 토리 히긴스(E. Tory Higgins)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가장 흔한 오류로 수단-목적의 전도를 지적했다. 처음엔 “사람을 섬기기 위해”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성과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희생”한다. 수단이 우상이 되는 순간이다. 달리 말하면, 야망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야망을 쥐고 가는 것이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가 말한 décréation(디크레아시옹)은 자기 소멸이 아니라, 자기중심을 한 칸 옆으로 밀어 하나님이 중심에 들어오실 자리를 비워 드리는 사유였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of Loyola)가 말한 “거룩한 차별 없음(holy indifference)”도 같다. 건강·명예·빈곤·풍요 가운데 어느 쪽이든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길이라면 그것을 선택할 자유를 지키는 태도다. 선택의 기준은 나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다.


정화되지 않은 야망은 속도를 사랑한다. 정화된 야망은 방향을 사랑한다. 속도는 나를 앞서가게 하지만, 방향은 함께 가게 한다. 예배 인도자가 마지막 고음 한 번을 덜어 내고 회중이 부를 수 있는 음역으로 낮추는 장면을 떠올린다. 실력은 숨고, 사랑이 드러난다. 회의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내 이름이 앞에 돋보이는 보고서보다, 팀의 이름이 선명한 결과를 선택하는 순간, 성과는 줄지 않고 신뢰가 자란다. 신뢰는 다음 문을 연다. 이것이 비움이 만들어 내는 확장의 법칙이다.


정화의 첫 질문은 단순하다. “이 일이 내 손을 떠나도 나는 하나님 안에서 충분한가?” 이 질문이 두렵게 느껴진다면, 이미 야망과 정체성이 강하게 얽혀 있다는 뜻이다. 데프나 오이서먼(Daphna Oyserman)은 “정체성-기반 동기(Identity-Based Motivation)”를 말하며, 목표가 정체성에 맞닿을수록 지속력이 생긴다고 했다. 우리의 정체성이 “사랑받는 자녀”라면, 야망은 그 신분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신분을 드러내는 섬김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포기가 가장 강력한 성취가 된다. 방향을 지키기 위해 속도를 내려놓는 결단, 관계를 지키기 위해 기회를 건너뛰는 결단,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말 한 줄을 덜어내는 결단. 야망은 줄었고, 영역은 넓어진다.


비움은 손해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산술은 다르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포도나무의 비밀도 같다. 가지치기는 상처가 아니라 열매의 예고다. 하나님은 잔가지를 덜어 주어 진액이 본줄기로 흐르게 하신다. 내 안의 불필요한 비교, 과시의 습관, 인정 중독을 잘라 낼 때, 에너지는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으로 모인다. 그렇게 모인 힘은 조용하지만 멀리 간다.


결국 야망의 정화는 주도권의 교환이다. “내 뜻을 이루게 하소서”에서 “당신의 뜻에 나를 맞추소서”로. 그 자리바꿈이 일어날 때, 야망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부르심의 연료가 된다. 더 큰 것을 위해 비운다는 말은, 더 크신 분을 위해 내 안의 자리를 비운다는 뜻이다. 그러면 내 업적이 아니라 그분의 일이 보인다. 내 이름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오늘 한 가지면 충분하다. 칭찬을 기대하던 문장을 한 줄 덜어 내고, 하나님께 올릴 감사 한 줄을 더한다. 내 자리로 끌어오고 싶던 스포트라이트를 반 걸음 옆으로 밀어, 함께 선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게 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과는 더 단단해진다. 누가 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이루어졌는지가 남기 때문이다.


주님, 날 정결케 하소서. 내 안의 빛나려는 마음이, 빛을 비추는 마음이 되게 하소서. 더 큰 것을 위해 비우게 하소서. 비운 자리에, 주님이 머무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