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23)
하루의 첫소리는 알람이 아니라 주전자 끓는 소리일 때가 좋다. 김이 오르는 것, 젖은 컵을 행주로 닦는 것, 창문을 여는 것. 거룩은 늘 이런 데 숨어 있다. 예배는 한 시간의 의식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 전부의 방향이다. 주일에만 드려지는 불꽃이 아니라, 월요일의 잔불로 이어지는 불씨이다.
예수님은 긴 세월을 나사렛에서 보냈다. 기적보다 길고, 설교보다 조용한 세월이다. 나무를 고르고, 못을 두드리고, 가루를 털어내는 일상.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오셨다는 복음은, 하나님이 평범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성도의 삶이 화려함으로만 증명될 필요는 없다. 제대로 만든 의자 하나, 정직하게 적은 장부 한 줄, 늦은 밤 다시 손 본 문장 한 문단. 이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문법을 배운 자의 문장부호가 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만인제사장 사상을 말하며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손도 제단 위의 제사만큼 귀하다”는 뜻을 남겼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는 인간 삶의 영역은 한 치도 없다”고 했다. 예배의 장소는 성소에서 부엌으로, 회당에서 사무실로, 성찬상에서 회의 테이블로 확장된다.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한 구절이, 출근길과 설거지와 숙제 검사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심리학은 이 믿음을 돕는다. 예일의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Amy Wrzesniewski)는 사람들이 일을 직업(job), 경력(career), 소명(calling)으로 다르게 본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똑같은 업무라도, 의미의 틀을 어떻게 고치느냐에 따라 만족과 성실이 달라진다. 그녀가 말한 ‘잡 크래프팅(job crafting)’은 업무를 바꾸기 전에 관점을 먼저 바꾸는 일이다. 메모 한 줄을 “귀찮은 반복”에서 “사람을 살리는 정확성”으로 번역하면, 손의 동선이 달라진다. 바바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의 확장-구축 이론(Broaden-and-Build Theory)은 작고 긍정적인 감정이 주의와 창의성을 넓혀, 결국 더 큰 역량을 구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 차를 우려내며 올리는 짧은 감사 한숨,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드리는 속삭이는 기도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다. 마음의 시야를 넓히고, 같은 일을 다르게 품게 한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집중은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했다. 일이란 결국 주의(attention)를 어디에 두느냐의 훈련이다. 시선을 임금에 두면 몸은 조급해지고, 시선을 이웃에 두면 손이 너그러워지고, 시선을 하나님께 두면 같은 동작이 예배가 된다. 같은 설거지라도, 접시에서 비누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불평을 씻어 내는 일이라 여기면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집중은 일을 고행에서 기도로 바꾼다.
이런 고백 앞에서, 탁월함과 선함은 싸우지 않는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선한 것을 세상에 내놓는 행위”라고 했다. 잘하려는 욕망은 선하려는 의지와 만나야 빛난다. 성과가 성품을 앞서면 일은 나를 비대하게 만들고, 성품이 성과를 무시하면 선의는 미숙으로 미끄러진다. 평범한 일의 영광은 이 균형에서 나온다. 옳게 하려고 애쓰며, 잘하려고 정성 들이는 것. 그래서 결과가 좋아도 자랑이 덜하고, 결과가 아쉬워도 낙심이 덜하다. 기준이 주께 하듯에 있기 때문이다.
팀으로 일할 때도 표지가 바뀐다. 내 이름이 빠진 공로를 억울해하지 않고, 우리의 열매를 기뻐할 수 있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곁의 존재는 위협 감각을 낮추고,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실제 능력이 된다. 그러나 신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간다. 우리는 단지 심리적으로 연결된 동료가 아니라,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지체다. 누군가의 평범한 성실 위에 다른 이의 탁월이 서고, 한 사람의 조용한 충성 위에 공동체의 빛이 선다. 이름이 남지 않는 자리일수록, 하나님은 더 선명하게 이름을 불러 주신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아니건가.
그래서 평범한 날을 사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똑같이 보이는 화요일에 하나님이 더 자주 오신다. 위대한 결정보다 사소한 반복이 우리를 만든다. 출근 카드 찍는 소리, 교실 문 여는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 칼과 도마가 맞부딪히는 소리. 이 소리들이 예배의 전주곡이 된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전 뜰만이 아니라,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기도는 이렇다. “주님, 오늘 내가 하는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 내가 쌓는 수고, 내가 고치는 화성, 내가 닦는 바닥, 내가 고르는 말, 이 모든 것이 주께 달려가 닿게 하소서.” 그러면 하루가 달라진다. 남들이 보지 못해도, 하나님이 보시는 그 장면이 우리를 붙든다. 평범은 작음이 아니라 깊음의 다른 이름이다. 그 깊음 속에서 우리는 배운다. 거룩은 큰일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고, 맡겨진 일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오늘도 예배는 종이 울리듯 시작하지 않는다. 당신의 손이 다시 자신의 일을 찾는 그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