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와 개모차

사랑조차 가성비를 따지는가

by 강훈

주말 오후 한강 공원. 저 멀리서 고급 유모차 한 대가 다가온다. '아기가 참 귀엽겠네' 생각하며 무심코 들여다본 그곳엔, 쪽쪽이를 문 아기 대신 선글라스를 낀 초콜릿색 푸들이 앉아 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풍경이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는 반려견용 유모차, 일명 '개모차'의 판매량이 유아용 유모차를 완전히 앞질렀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혀를 찬다. "애는 안 낳고 개만 키우니 나라가 망하지." 하지만 나는 그 유모차를 미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이기심이 아니라, 지독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본다.


가장 안전한 사랑의 대상

우리는 왜 사람 대신 개를 선택했을까? 냉정하게 말해, 현대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초고위험 투자'다. 천문학적인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내 모든 것을 희생해 키운 아이가 나에게 사랑을 돌려줄지, 아니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남이 될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반면 반려동물은 어떤가. 내가 밥을 주면 꼬리를 흔들고, 내가 집에 돌아오면 세상이 떠나갈 듯 반긴다. 배신하지 않는 사랑, 예측 가능한 기쁨. 복잡한 인간관계에 지친 현대인에게 이보다 완벽한 '정서적 가성비'는 없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그의 저서 <Liquid Love(사랑하지 않을 권리)>에서 현대인의 관계 맺기를 이렇게 통찰했다.

"현대인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 관계가 가져올 '부담'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언제든 접속하고 끊을 수 있는 느슨한 유대, 혹은 내가 통제 가능한 대상을 선호한다."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어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포기했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은 본능, 누군가를 돌보며 내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까지 거세된 것은 아니다. 그 갈 곳 잃은 모성애와 부성애가 향한 곳이 바로, 나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숭배해 주는 작은 생명체, 강아지다.


책임의 무게를 견딜 수 없는 사회

이 현상을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로 돌릴 수는 없다. 이것은 사회가 만든 비극이다.

한 생명(인간)을 길러내는 일은 엄청난 인내와 불확실성을 견뎌야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아주 잠깐의 뒤처짐도 용납하지 않는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생존 경쟁'의 정글에서, 타인(아이)의 삶까지 책임지라는 요구는 공포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세 살'로 머물러 주는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운다. 그것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더 이상 무거운 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는 슬픈 항복 선언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

개모차를 미는 그 마음을 비난할 수는 없다. 동물과 나누는 교감 또한 삭막한 도시를 버티게 하는 따뜻한 위로임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말 잘 듣고 예쁜 짓만 하는 존재와의 사랑이, 과연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대개 불편하고, 지저분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아이가 떼를 쓰고, 사춘기를 겪고, 부모와 갈등하며 성장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좁은 우주를 깨고 타인을 품는 법을 배운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인간은 자란다.

개모차 속의 강아지는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 안락함이 인간이 겪어야 할 성장의 기회까지 덮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부디 그 유모차에 쏟는 정성이, 언젠가는 다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체온으로 옮겨 붙기를. 그래서 우리가 '통제 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견디어내는 용기 있는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