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외로움의 연대
찬 바람이 부는 12월의 광화문. 태극기와 십자가를 든 백발의 노인들 틈으로, 낯선 얼굴들이 보인다. 말끔한 패딩을 입고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생중계하는 20대, 30대 청년들이다. 과거 노인들의 전유물이었던 그 광장에 젊은 피가 수혈되었다. 어색하고 기이한 이 '세대 연합'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그들을 '가스라이팅 당한 피해자'나 '일베'라고 손쉽게 규정한다. 하지만 그 낙인만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노인과 청년,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그러나 같은 '고립'의 끝에서 만났다.
노인의 고립: 잊혀짐에 대한 공포
먼저 노인들이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그들은 '시간의 난민'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고립된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집단적 이데올로기에 의존한다"고 했다. 집에서도 설 자리를 잃은 그들에게 광장은 유일하게 자신을 '애국자'로 호명해 주는 해방구다. 그들의 분노는 사실 "나 아직 여기 살아있다"고 외치는 처절한 인정 투쟁이다.
청년의 고립: 도태됨에 대한 공포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그곳에 섰는가? 그들의 고립은 ‘박탈감'에서 온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지만, 단군 이래 최악의 생존 경쟁에 내몰린 세대.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 사다리는 끊어졌고, '공정'을 외쳐봤자 돌아오는 건 기득권의 비웃음뿐이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렇게 통찰했다.
"무기력한 개인은 자유의 짐을 벗어던지고, 강력한 힘(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안정을 얻으려 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에게 민주주의의 복잡한 절차나 '타인을 위한 배려'는 사치스러운 위선으로 느껴진다. 차라리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뒤집어엎겠다는 계엄군의 군화발이, 혹은 노골적으로 내 밥그릇을 챙겨주겠다는 혐오의 언어가 더 '솔직하고 시원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극우 집회는 정치 참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복수'이자 불안을 잊게 해주는 '도파민 축제'다.
혐오라는 이름의 슬픈 동맹
결국 광장에서 만난 노인과 청년은 '패자들의 슬픈 동맹'이다. 산업화의 역군이었으나 잊혀진 노인, 무한 경쟁의 선수였으나 낙오될 위기에 처한 청년.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두 세대가 서로의 손을 잡고 '혐오'라는 공통의 언어로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청년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보고, 청년은 노인에게서 '확신의 권위'를 빌려온다.
그 손을 놓게 하려면
그래서 이 기이한 연대를 깨뜨리는 방법은 그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광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회적 고립'의 뿌리를 직시하는 것이다.
노인에게는 존중받을 수 있는 자리를, 청년에게는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돌려주지 않는 한, 광장의 함성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깃발을 든 그들의 손, 그 떨림 속에 숨겨진 것은 폭력이 아니라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