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리듬 3. 기다림의 시간학

아직과 이미 사이

by 강훈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로마서 8:24–25)

“나의 영혼이 주를 기다리며…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편 130:5–6)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 사이에서 인간은 시간을 배운다. 시계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익어간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이를 가리키는 두 낱말이 있다. 흘러가는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 도래하는 기회의 때는 카이로스(kairos)다. 기다림은 크로노스를 비우는 기술이 아니라, 카이로스를 맞이하는 신뢰다.


성경의 기다림은 단념이 아니라 인내다. 신약이 즐겨 쓰는 단어가 있다. 인내, 원어로 살펴보면 ‘아래에 머문다’는 뜻이다. 무게를 버티며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마음. 바울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볼 때 이 인내가 자란다고 했다. 보이지 않기에 붙들어야 한다. 만져지지 않기에 더 신실해진다. 기다림은 부재가 아니라 약속의 또 다른 얼굴이다.


월터 미셀(Walter Mischel)의 ‘지연된 만족(delay of gratification)’ 연구가 말해 준 것은 단순히 참는 법이 아니다. 더 큰 기쁨을 현재로 끌어와 상상하고, 그 그림이 현재의 충동을 다독이게 하는 능력이다. C. R. 스나이더(C. R. Snyder)가 ‘희망(hopes)’을 “목표, 길, 의지”의 결합이라고 설명할 때, 그는 기다림이 수동적 멈춤이 아니라 적극적 정렬임을 보여준다. 목표를 기억하고, 길을 찾고, 의지를 불러 모으는 행위. 그건 바로, 약속을 기억하고, 순종의 길을 물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과 같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기대(expectation)’와 ‘희망(hope)’을 구분했다. 기대는 도착 날짜가 정해진 우편물을 기다리는 일이다. 늦어지면 초조해진다. 희망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일이다. 설령 오지 않아도 그 사이의 충실함이 관계를 빚는다. 신앙의 기다림은 후자에 가깝다. 우리는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린다. 약속의 내용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을 기다린다. 그래서 “아직”이 길어져도 “이미”가 버티게 한다. 십자가에서 이미 시작된 통치, 빈 무덤에서 이미 열린 부활 신앙이 오늘의 발걸음을 붙든다.


기다림은 우리를 현실로 데려온다. 아직 손에 쥐지 못한 것을 붙들려고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일상을 놓치기 쉽다. 대림절(Advent)은 교회가 매년 배우는 시간의 문법이다. 오실 분을 기다리며, 이미 오신 분을 누린다. 촛불을 하나씩 더할수록 어둠은 얇아지고, 한 주의 일상과 삶의 여정은 그분의 오심을 위한 준비가 된다. 기다림은 어제의 실패를 씻어 내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의 충실함을 쌓아 올리는 시간이다.


농부는 날마다 밭에 나가지만, 씨앗을 “빨리” 자라게 하지는 않는다. 땅을 지키고, 물을 주고, 서리를 막고, 잡초를 뽑는다. 그 모든 ‘작은 예배’들이 카이로스를 맞이하는 삶의 기도다. 우리도 그렇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화해를 위해, 오늘 한 문장 덜 상처 주는 말을 고르고. 아직 열리지 않은 길을 위해, 오늘 한 걸음 더 정직하게 일을 마치고.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 속에서, 오늘 한 번 더 감사의 이름을 부르고. 이런 소소한 충실함이 “이미”를 현재로 당겨와 “아직”을 견디게 한다.


기다림은 불확실성의 벌이 아니라 현존의 은혜다. 크로노스를 채우는 것은 불안이지만, 카이로스를 여는 것은 사랑이다. 파수꾼은 밤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새벽을 믿기에 밤을 지킨다. 우리도 그처럼 밤을 지키는 사람이고 싶다. 아직과 이미 사이, 그 좁은 다리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버티게 하시고, 때가 차면 건너게 하신다. 오늘은 그 다리 위에서,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사랑이 허락한 만큼만 걸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