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림자를 외면한 성화(聖化)의 비극

by 강훈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선함'은 거부할 수 없는 당위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구절들은 신자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혼을 옥죄는 거대한 창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좋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화를 참아야 하고, 슬픔을 은혜로 포장해야 하며, 미움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황급히 덮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인간의 내면에 수용하기 힘든 본능이나 열등한 인격이 모인 영역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다. 그는 "그림자를 의식화하지 않으면, 그것이 내 삶의 배후에서 운명이 된다"고 경고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룩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우리 내면의 질투, 분노, 탐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지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문제는 이 '억압된 그림자'가 종교적 열심이라는 가면을 쓰고 기괴한 방식으로 분출될 때 발생한다. 겉으로는 지극히 경건해 보이는 이가 뒤에서는 타인을 가혹하게 비난하거나, 가족들에게 감정적, 혹은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를 우리는 드물지 않게 목격한다. 이는 신앙이 인격을 성장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를 더 깊이 숨기는 세련된 기술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철학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 도덕' 역시 이 지점을 관통한다. 스스로의 힘과 욕망을 긍정하지 못한 채,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억누르는 이들은 결국 내면에 비겁한 원한(Ressentiment)을 쌓게 된다. '나이스(Nice)'한 기독교인이 되려는 강박이 실상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향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뼈아픈 부분이다.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박제된 성인'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일갈했고, 성전의 장사꾼들을 보며 물리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거룩함이란 완전무결한 상태가 아니라, 진리 앞에 철저하게 정직한 상태였다.


진정한 영성은 '완벽(Perfection)'이 아니라 '온전(Wholeness)'을 지향한다. 온전함이란 내 안의 빛뿐만 아니라 어둠까지도 내 존재의 일부로 인정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합니다"라고 거짓말하는 것보다, "나는 지금 당신과 세상을 증오하고 있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절규하는 것이 훨씬 더 신앙적인 행위다.


종교적 위선은 '믿음'으로 감정을 통제하려 할 때 싹튼다. 그러나 신앙은 감정의 통제가 아니라 감정의 대면이어야 한다. 내 안의 지저분한 감정들을 '불신앙'의 증거로 치부하며 밀어낼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님의 발 앞에 정직하게 쏟아놓아야 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내 안의 괴물을 정직하게 마주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 어둠을 통과하지 않은 빛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이제 '착한 신자'라는 가면을 벗고, '정직한 죄인'으로서의 민낯을 마주할 때다. 비로소 거기서부터 진짜 신앙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