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유익이라는 거짓말

'하나님의 뜻'이라는 무책임에 대하여

by 강훈

타인의 참혹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는 서둘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거야", "더 큰 복을 주시려는 연단이야" 이와 같은 말들은 위로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고통당하는 자의 비명을 신앙적 문장으로 틀어막는 행위에 가깝다. 고통은 그 자체로 파괴적이며, 때로는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못한 채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고난에 즉각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통제 욕구'에서 기인한다. 세상이 이유 없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기에, 우리는 모든 사건에 원인과 결과라는 서사를 부여하려 애쓴다. 그래야만 내가 사는 세상이 안전하다는 착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거나, 삶의 기반이 무너진 이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운운하는 것은 그가 겪는 슬픔의 고유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폭력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삶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불행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바구니에 담아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태도는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신앙적 유약함의 증거일지 모른다.


성경 속 욥기(Job)는 이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고난 받는 욥을 찾아와 인과응보의 논리로 그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려 했던 친구들을 향해 하나님은 분노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처우에 항변하며 고통의 이유를 묻고 또 물었던 욥의 '불온한 정직함'을 하나님은 옳다고 인정한다. 고난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재 위에 앉아 침묵하는 것이다.


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 역시 고통 앞에서 '정답'을 말하는 교사가 아니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는 죽음 이후의 부활이라는 신학적 강의를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들과 함께 '우셨다'. 신학적 정답을 알고 있었을 그조차도 고통받는 인간의 실존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찾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공감(Compassion)의 본질이다.


고난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 그것은 아프고, 지독하며,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할 비극이다. 다만, 그 폐허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적 행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서로의 슬픔에 곁을 내어주는 연대뿐이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오만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우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신앙은 고통의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곁에 있음을 믿는 모험이다. 그러니 제발, 타인의 눈물 앞에서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려 들지 말자.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침묵 속에 건네는 따뜻한 물 한 잔이 더 거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