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확신이 낳는 괴물들
많은 종교 공동체에서 의심은 금기시된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은 신앙의 미덕으로 칭송받고, 질문을 던지는 이는 '믿음이 약한 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러나 의심을 억압하고 얻어낸 확신은 위험하다. 질문이 실종된 신앙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타인을 정죄하고 자신의 논리 안에 갇히는 폐쇄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맹목적인 확신은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일 확률이 높다. 인간은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이때 종교가 제공하는 명쾌한 '정답'은 아주 매력적인 안식처가 된다. "무조건 믿으면 복을 받는다"거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식의 단순 명료한 논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오는 불안을 단번에 해소해 준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안정을 위해 지성을 포기하는 순간, 신앙은 성장이 멈춘 '유아기적 상태'에 고착되고 만다.
철학적 관점에서 의심은 진리로 나아가는 가장 정직한 통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Descartes)는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써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기초를 찾으려 했다. 신앙에서도 '방법적 회의'는 필요하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인지, 아니면 내 욕망이 투영된 '우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의심이라는 여과기를 거치지 않은 믿음에는 온갖 미신과 편견,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불순물처럼 섞여 있기 마련이다.
성경은 의심하는 자들을 내치지 않는다. 부활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며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봐야겠다"고 말했던 도마를 예수님은 꾸짖기보다 자신의 상처를 직접 내보였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처절한 원망과 의구심을 쏟아냈다. 그들에게 의심은 하나님을 떠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연결되고 싶다는 갈망의 역설적 표현이었다.
맹목적인 확신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자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확신에 찬 이들이 역설적으로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종교 역사가 증명하는 비극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그러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Deus lo vult)"라는 단 하나의 확신은 수많은 생명을 학살하는 광기의 면죄부가 되었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역시 '진리를 수호한다'는 서슬 퍼런 확신이 낳은 참극이었다. 내가 가진 답이 절대적이라고 믿을 때, 인간은 그 답에 동의하지 않는 타인을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진다.
성경 속에서도 가장 확신에 차 있던 부류는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완벽한 해석과 확신을 가졌기에, 그 틀을 벗어난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가장 잘 안다고 확신했던 자들이 신을 죽이는 주역이 된 것이다.
반면, 자신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의심을 품은 자는 타인의 고통과 고민에 공감할 여지를 갖는다. 질문을 허용하는 신앙만이 환대와 포용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성숙한 신앙이란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나무와 같다. 의심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건물을 지탱하는 철근과도 같다. 의심하고 질문하며 방황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다.
그러므로 이제 정직하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믿는 바가 상식에 부합하는지,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길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질문하기를 멈추고 박제된 교리 속에 숨어버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믿음은 의심의 바다 위를 걷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