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는 자'들이 더 무례한가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종종 양가적이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라는 평 뒤에는 '무례하다', '독선적이다', '말이 안 통한다'는 냉소적인 시선이 따라붙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겸손해야 할 신앙의 언어가 가장 교만한 태도로 출력되는 현상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사랑을 말하면서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고, 은혜를 말하면서 정작 인간적인 예의는 생략하는 이 모순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는 '도덕적 우월감'을 기반으로 한 나르시시즘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믿을 때, 자아를 확장하고 강화하려는 본능을 가진다. "나는 구원받았다" 혹은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확신은 내면의 열등감을 보상해 주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이때 타인은 존중받아야 할 동등한 인격이 아니라, 내가 가르쳐야 할 대상 혹은 개종시켜야 할 '객체'로 전락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 타인의 감정이나 입장을 배려하는 '공감'은 설 자리를 잃는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윤리의 시작을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할 책임을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종교적 폐쇄성에 갇힌 이들은 타자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타자의 얼굴 대신 자신이 믿는 '교리'라는 거울을 본다. 상대방이 겪는 고통이나 개별적인 상황보다 "이 사람은 죄인인가 아닌가", "우리 편인가 아닌가"를 먼저 판별한다. 타자의 고유성을 지워버리는 이 지적인 게으름이 종교적 무례함의 본질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값싼 은혜'가 주는 면죄부다. 신에게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사람에게 입힌 상처에 대한 사과를 생략하게 만든다. 영화 <밀양>에서 유괴 살인범이 피해자 가족에게 "하나님이 이미 나를 용서하셨다"며 평온하게 미소 짓는 장면은 종교적 위선이 도달할 수 있는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수평적 관계에서의 윤리를 수직적 관계(하나님과 나)의 확신으로 덮어버리는 행위는 신앙이 아니라 '윤리적 파산'이다.
성경 속 예수님이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대상은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완벽한 기준을 가지고 타인을 정죄하는 데 능숙했지만, 정작 그 이면에 숨은 자신의 추악한 그림자는 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종교적 형식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랑보다 앞설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모든 종교적 가치가 '인간 존중'이라는 상식 위에 세워져야 함을 의미한다.
진정한 영성은 나를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숙한 신앙인은 타인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몸을 낮춘다. 자신의 확신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늘 경계하며, '진리'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신앙은 인간을 '초인'으로 만드는 마법이 아니라,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드는 성찰의 과정이다. 상식과 예의를 상실한 영성은 가짜다. 세상이 기독교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유창한 복음의 설명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과 정중한 태도다. 무례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수준을 깎아내릴 뿐이다. 진짜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눈앞에 보이는 인간을 정성껏 대접하는 평범한 예의에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