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과 탐욕 사이에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 '욕망'은 대개 부정적인 단어로 취급된다. "육신의 정욕" 혹은 "세상의 탐심"이라는 프레임은 욕망을 죽여야 할 괴물이나 극복해야 할 죄성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은 자신의 욕구를 수치스러워하거나, 이를 억누르는 '금욕'을 경건의 척도로 삼곤 한다. 하지만 욕망을 죽이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로 끝나며, 오히려 더 기괴한 형태의 위선이나 보상 심리를 낳을 뿐이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욕망은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에너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한 '리비도(Libido)'나 칼 융(Carl Jung)의 '정신 에너지'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이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억압할 때, 인간의 내면에는 심각한 병증이 생긴다. 억눌린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가, 어느 순간 권력욕이나 타인을 향한 가학적 정죄, 혹은 은밀한 중독의 형태로 분출된다. 욕망을 부정하는 자는 결국 그 욕망에 지배당하게 된다.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코나투스(Conatus)'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본능적인 노력이다. 신앙이 이 본질적인 에너지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거룩함이란 욕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에너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방향'의 문제다.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를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비극은 욕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의 순서가 뒤섞였을 때 발생한다.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을 가장 사랑하고, 유한한 물질이나 쾌락을 그 아래에 두는 '질서가 지워진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성취하고 싶은 모든 욕구는 원래 선한 것이며, 다만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할 때 탐욕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겼으며, 그 모습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던지 당대 사람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태복음 11:19)"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외로운 자의 갈망을 채워주었다. 그에게 영성이란 욕망을 꾹꾹 억누르는 박제된 성스러움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뜨거운 갈망을 올바른 질서 위에 세우는 '생명력의 충만함'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금욕의 강박'이 아니라 '욕망의 승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갈망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타인을 섬기는 동력이 될 수 있고,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는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책임감이 될 수 있다. 욕망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삶의 재료다.
진정한 신앙은 욕망을 가진 인간의 실존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욕망이 없는 기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깊게 갈구하며, 그 모든 에너지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다만 그 욕망이 타인을 해치지 않고, 나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으며, 더 높은 가치를 향해 흐르도록 길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상식적인 거룩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