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라는 환상
교회는 본질적으로 '함께'를 강조하는 곳이다. '지체', '가족', '공동체'라는 단어들이 매 주일 강단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많은 이들이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예배당 한복판에서 깊은 소외를 경험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 부르지만, 정작 자신의 가장 비참한 속내나 해결되지 않는 의심은 발설하지 못한다. 환대와 사랑의 상징이어야 할 공동체가 도리어 개인의 진실함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는 '집단 사고(Groupthink)'와 '가짜 자아(False Self)'의 문제다. 특정 신념이나 분위기가 지배적인 집단 내에서 개인은 조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고 집단이 원하는 '페르소나(Persona)'를 덧씌운다.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은혜로운 모습'이라는 표준에 맞추기 위해, 신자들은 자신의 슬픔, 분노, 냉소를 검열한다. 모두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비슷한 신앙의 언어를 구사하는 곳에서, '진짜 나'는 갈 곳을 잃고 숨어버린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면과 가면이 만날 때 인간은 군중 속에서 극심한 고독을 느낀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익명의 대중 속에 동화되어 사는 상태를 '세인(Das Man)'이라 불렀다. 세인은 타인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타인이 믿는 대로 믿으며, 타인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는 '평범한 인간'을 뜻한다. 공동체라는 이름의 집단성이 개인의 고유한 실존을 삼켜버릴 때, 신앙은 '나와 하나님의 단독적 관계'가 아니라 '집단의 관습'으로 전락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소속감이 도리어 인간을 영적 무기력과 근원적인 외로움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귐인 '코이노니아(Koinonia)'는 취향이나 목적이 같은 이들이 모인 사회적 클럽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부서짐과 결핍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연대다. 예수님이 만난 공동체는 늘 파격적이었다. 그는 당대의 주류 집단이 배제했던 세리, 창녀, 나병 환자들과 식탁을 공유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공통된 신학적 정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치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정직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환상'을 깨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늘 행복한 공동체"라는 거짓된 신화를 걷어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며, 언제든 서로를 오해할 수 있는 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출발점이다. 공동체는 나의 외로움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피난처가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존중하며 그 거리를 지켜봐 주는 인내의 장소여야 한다.
신앙은 나를 집단 속에 숨기는 도구가 아니라, 집단의 압력 속에서도 '나'라는 고유한 존재를 지켜내며 타인과 정직하게 연결되는 투쟁이다. 홀로 설 수 없는 자는 결코 제대로 함께 설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고독은 내가 지금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서 있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가면'을 벗어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가 서로의 완벽함이 아니라 서로의 '틈새'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비로소 지독한 외로움을 걷어내고 따뜻한 온기를 품은 인간적인 공간으로 회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