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단은 권력을 옹호하는가

우상이 된 '강한 지도자'

by 강훈

현재 대한민국은 내란 재판이라는 전대미문의 사법적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헌법을 파괴하려 했던 행위에 대한 단죄가 논의되는 시점에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여전히 특정 권력자를 향한 옹호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인도 아니며, 오히려 무속 신앙이나 통일교, 신천지와 같은 이단적 집단과의 연루설이 끊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신앙적 순혈주의를 강조하던 이들이 왜 자신들의 신념과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에게 이토록 관대한가. 이 지독한 모순은 신앙의 탈을 쓴 '정치적 생존 본능'에서 기인한다.


-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불안에 의한 투사'의 결과다.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에게 세상은 '공산주의'나 '반기독교 세력'이라는 가상의 적으로 가득 찬 위험한 곳이다. 이 공포가 극에 달하면, 신자들은 지도자의 도덕성이나 신앙심보다 "나의 진영을 지켜줄 수 있는가"라는 효용성을 우선순위에 둔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가 작동하는 순간, 지도자의 무속 연루나 반헌법적 행위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부수적 결함'으로 눈감아진다. 신앙이 진리를 추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집단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거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 정치적 부속품이 된 신앙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주권자란 예외적인 상황에서 법을 초월하여 결단을 내리는 존재다. 일부 기독교 세력은 윤석열이라는 인물을 법과 절차를 초월해서라도 '악(그들이 규정한 진보 혹은 좌파)'을 척결해 줄 정치적 메시아로 투사했다. 그가 무속을 믿든 통일교, 신천지와 연결되든, 그것은 '우리 편'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에서의 사소한 소음일 뿐이다. 이들에게 신앙은 보편적 정의를 세우는 기준이 아니라, 내 편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정치 신학'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 권력의 힘을 맛 본 자들

신학적으로는 이를 '콘스탄틴주의(Constantinianism)'의 잔재로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교회는 권력과 결탁하여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보다 권력의 비호를 받는 안락함을 선택해 왔다. 권력이 주는 힘을 맛본 종교 지도자들은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자의 불의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성경 구절을 왜곡하여 그를 축복한다. 로마서 13장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은 권력이 헌법과 인권을 유린할 때조차 무조건적으로 인용되는 전매특허 방패가 된다. 하지만 성경의 정신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약자의 편에 서는 것에 있음을 그들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 우상숭배가 되어 버린 신앙

더욱 기이한 것은 무속과 이단에 대한 관용이다. 평소 다른 종교나 이단에 대해 그토록 배타적이던 이들이 특정 정치인 앞에서는 침묵한다. 이는 그들이 믿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포장된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그 권력을 지켜줄 수만 있다면 사탄과도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 그것이 오늘날 정치화된 한국 기독교의 일그러진 민낯이다. 진리를 독점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가장 비진리적인 권력 앞에 무릎 꿇는 풍경은, 그들의 신앙이 이미 우상숭배로 변질되었음을 시사한다.


- 진짜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참된 신앙은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지도자가 헌법을 유린하고 내란의 혐의로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조차 '눈먼 옹호'를 보내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집단적 최면'이다. 기독교가 사회적 상식을 잃어버리고 권력의 홍위병을 자처할 때, 복음은 그 빛을 잃고 조롱거리가 된다. 이제 제단 위에 올려진 정치적 우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권력자가 아닌, 그 권력에 의해 신음하는 정의와 진실의 가치에 다시 집중하는 것, 그것만이 무너진 기독교의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