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기술

사랑, 타인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

by 강훈

사랑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마케팅 용어다. 대중음악부터 광고,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하트 표시까지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자기애(Self-love)'의 확장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상대에게 투영하고, 상대가 내 욕망을 채워줄 때만 가동되는 조건부 감정. 이 가벼운 유희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 채 각자의 고독한 성벽 안에 갇혀 산다. 신앙이 주는 사랑의 유익은 이 견고한 자아의 성벽을 허물고, 비로소 누군가의 얼굴을 직시하게 만드는 반전의 힘에 있다.


- ‘느낌’이 아닌 ‘주권적 바라봄’

우리는 흔히 사랑을 '빠지는 것(Falling in love)'이라 말하며 수동적인 감정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감정은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이익에 따라 쉽게 차갑게 변한다. 신앙적 관점의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바라봄(Attention)’이라는 능동적인 행위다.

상대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 계산하기를 멈추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나의 편견과 욕망이라는 필터를 거두고 한 인간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하는 일은 지독하게 어려운 훈련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에게 소유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존중하는 주권적 결단이다.


- ‘탈자아화’라는 거룩한 기술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은 사랑을 '나 이외의 다른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지극히 어렵게 깨닫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인 환상 속에 갇혀 산다고 보았다. 머독에게 사랑은 이 자아라는 환상의 구름을 뚫고 나와, 타인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마주하는 ‘탈자아화(Unselfing)’의 과정이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 탈자아화의 기술을 가르친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는 나와 타인이 동일하게 존엄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대해진 자아를 축소시켜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통과할 때 인간은 비로소 ‘나’라는 감옥에서 탈출해 진짜 세계와 연결되는 유익을 누린다.


- 연대, 인간에 대한 최후의 예의

사랑의 유익은 사적인 위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연대로 확장된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말했듯, 진정한 사랑은 타인의 고통 속에 기꺼이 머무는 '환대'다. 세상이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며 쓸모없는 존재들을 지워버릴 때, 사랑을 아는 자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낸다.

혐오가 가장 쉬운 감정이 된 시대에, 굳이 에너지를 들여 누군가의 슬픔에 공명하는 것은 주권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행동이다. 사랑은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이 비인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후의 보루다.


- 가장 아름다운 주권의 행사

결국 사랑은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주권이다. 보상받을 확률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배신당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 그 비합리적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기계나 노예가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만족을 위한 소모품인가, 아니면 당신을 넘어선 누군가를 향한 숭고한 응답인가. 자아라는 좁은 창문을 닫고 밖으로 걸어 나가 보라. 당신의 도움도, 당신의 평가도 아닌, 그저 당신의 정직한 '바라봄'을 기다리는 수많은 실재가 거기 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환대하는 순간, 당신의 삶은 비로소 허무를 뚫고 영원한 의미의 지평으로 나아갈 것이다.